미국은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한국에 대한 경제부흥 정책을 구상했는데 이는 탈식민지화 정책하에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美)군정이 종식되고 1949년 1월에 주한미사절단(American Mission in Korea·AMIK)이 설치되었으며, 1949년 1월1일자로 대한 원조의 책임이 경제협조처(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ECA)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1949년 2월부터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조사 및 대한 원조의 구체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미군정 기간 경제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첫째 식민지 시기로부터 이어져 온 농지 문제를 개혁하는 것과 일본 자본에 의해 운영되었던 기업과 공장을 복구하는 것 또는 경제부흥의 문제로 크게 구분할 수 있고, 둘째는 심각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이슈는 미군정 기간 동안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한민국 정부로 그대로 이관되었는데, 대한민국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 군사원조가 아닌 경제원조를 통한 ECA의 한국에 대한 부흥계획은 6·25전쟁의 발발과 북한군의 남하, 그리고 유엔군의 참전 및 역공세와 3년간의 전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ECA 원조는 중단되고 구제·구호적 성격의 한국민간구호(Civil Relief in Korea·CRIK) 원조가 지원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후 복구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자 미국은 원조를 증가시키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운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950년대 미국의 대한 경제 정책은 ‘성장’보다는 동북아 안보를 위한 ‘안정’에 집중돼 있었다. 1951년 이후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는 상호안전보장법(Mutual Security Act·MSA)에 의해 대외활동본부(FOA) 및 국제협력국(ICA) 원조로 제공되었는데,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방위 지원은 장기적인 경제발전보다는 경제 안정과 군사 예산의 보전에 중점을 두고 실시되었다.
미국은 1952년 5월 한국 주재 미국경제고문단이 한국 정부와 함께경제 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검토·결정할 기구로 한·미 합동경제위원회(CEB)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제조정 협정(마이어 협정)’을 체결하고 경제 통제의 완화와 자유시장경제로의 이행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헌법 개정·귀속재산 불하 촉진·은행의 민영화·외국인 투자의 촉진 등이 협의되었다. 미국 측이 국가사회주의의 경향성을 가졌다고 우려해 온 제헌헌법의 경제 조항은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의 발의로 국유 부분을 삭제 또는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한국과 미국은 전후 재건의 틀을 짜기 위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 한국 정부는 부흥계획서를 미국 측에 제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요구해 온 재정금융 안정을 수용하면서도 원조물자의 실수요자에 대한 직접배급·국가 주도의 기간산업 건설 등 국가의 일정한 개입을 통한 경제운영으로 남한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백두진 국무총리가 주도한 ‘재건기획팀’이 구상한 전후 남한 경제의 재건 방향은 자유경제의 원칙에 따라 자본가가 중심이 되어 전후 재건사업을 담당하되, 후진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정부가 기간산업 부문에 개입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 방식으로, 경공업은 자본가가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기간산업은 정부가 융자를 통해 조성하는 ‘경공업·기간산업 동시 발전 노선’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정·재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을 총망라해 ‘산업개발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산업개발위원회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논의 과정에서 산업구조의 불균형·부의 불평등·원조의 감소·북한과의 대치 상태라는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고 한국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산업개발위원회는 한국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화학공업화에 주력했다. 또한 분배와 고용보다는 자본 축적과 생산력 극대화에 주안점을 두는 개발 계획안을 마련했고, 이는 정부안으로 수렴되었다. 이로써 일제 치하를 거쳐 해방 이래로 오랜 기간 논란을 거듭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방안은 정·재계, 학계의 논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안으로 정리되었다.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기획과 발상은 이후 더욱 구체화되어 결국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으로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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