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과 계몽주의를 이야기할 때 드니 디드로를 빼놓을 수 없다. 디드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학식과 재능을 떨치며 민중 계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소설·희곡·비평·에세이는 물론 백과사전을 20년간 편찬해 지식을 통해 세상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이 위대한 인물의 성장기는 좀 독특하다. 디드로는 1713년 10월5일 프랑스 동부 랑그르(Langres)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장인 가문의 후손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제가 되길 원했다. 이 뜻을 받들어 디드로는 예수회 소속 중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그는 파리로 떠나 소르본대학에 진학했고 곧 ‘신부 디드로’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계몽주의 철학을 접하며 무신론자로 변해 갔고 1732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사제직을 포기했다. 지식에 대한 갈증과 철학적 신념에 인도된 그는 검사 서기로 일하면서 영어·수학·물리학·미술·고대 언어 등 모든 분야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분주했고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보헤미안 생활을 즐기던 디드로는 1742년 장 자크 루소를 만났다. 매우 교양 있는 이 두 젊은이는 미덕에 대해 같은 생각을 공유했고 고대(古代)를 동경했다. 하지만 이들의 성격은 정반대였고 철학과 현실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루소는 ‘철학자’라는 용어를 경멸했고, 디드로는 이 명칭을 주장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지길 원했다.
루소를 만난 후부터 디드로는 글쓰기에 매진했고 1746년 ‘철학적 사유’를 완성했다. 무신론과 자연 종교에 심취한 그는 이 작품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종교와 도덕에 위배되므로 불태워야 한다는 당국의 비난을 받았다. 1년 후인 1747년 10월16일, 파리 서점상 대표 앙드레 르 브르통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에게 백과사전 편집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로부터 2년 후 6월 디드로는 이 사전 편찬의 일환으로 ‘맹인에 대한 편지(La Lettre sur les Aveugles)’를 출판했다.
이로 인해 디드로는 곧 투옥당하는 불행한 신세에 처하게 된다. 1749년 7월24일 새벽, 36세의 디드로는 파리의 에스트라파드(Estrapade) 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체포됐다.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신념을 옹호하는 작품을 저작했다는 죄명이었다.
이 책 역시 익명으로 출판됐지만 디드로는 경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상태였다. 디드로의 구역에 있는 생 메다르 성당(St Médard) 사제는 “디드로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젊은이지만 종교를 공격하는 여러 철학서를 썼고, 그의 연설도 이 서적들과 유사하다”며 가차 없이 고발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상가가 되기 어려웠다. 검열이 매우 심하고 최악의 경우엔 자신의 발언 때문에 감옥에 갇혀야 했다. 샤토 드 뱅센에 수감된 디드로는 심문을 받자 문제의 작품들의 저자는 자기가 아니라며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출판사 측은 저자를 감싸 주지 않고 정반대의 진술을 했다. 디드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만 했다.
그의 죄수 일지에는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이 젊은이는 성자들을 경멸적으로 이야기하는 매우 위험한 인물입니다”고 기록돼 있다. 3개월 넘는 시간을 보낸 후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백과사전 작업을 재개했고 감옥에서의 약속을 지켜 국가와 종교를 괴롭힐 만한 어떤 책도 더 이상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세계·삶·사상은 신의 개입 없이 보편적인 감수성을 통해 스스로 진화한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디드로가 투옥된 샤토 드 뱅센 감옥은 악명이 높다. 하지만 이곳은 본래 대규모 사냥 공원으로 발전하면서 성이 매우 아름다웠다. 신선한 공기를 즐길 수 있고 안전한 장소인 이곳은 14세기 프랑스 왕국이 왕실의 중심지이자 군사 요새로 활용했다. 그러나 15세기 말, 루이 11세는 이 성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지하를 감옥으로 사용하라는 엄명이었다. 이 성은 아무나 수감되는 곳이 아니라 왕의 요청에 따라 1급 정치범들만 가는 곳이었다.
후대 왕들은 더 편안한 성곽의 남서쪽에 있는 정자로 자리를 옮겨 갔지만 지하는 바스티유처럼 여전히 형무소로로 활용됐다. 예를 들어, 1574년 앙리 드 나바르, 즉 미래의 왕 앙리 4세는 알랑송 공작과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이곳에 연금됐다.
1650년 그랑 콩데와 1661년 루이 14세의 재정 감독관 니콜라 푸케가 그 뒤를 이었다. 관습법을 어긴 죄수들은 또한 왕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그곳으로 보내졌다. 18세기 들어서는 디드로와 미라보가 여기에 수감됐다.
정의를 위해서라고 미화했지만 샤토 드 뱅센 감옥은 사실 왕실 억압의 상징 중 하나였다. 1784년 루이 16세는 국민의 분노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지만 나폴레옹은 19세기 초에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은 주립 교도소로 활용되고 있다.
프랑스 역사 교과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 성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채와 난간 산책로·메인 안뜰·생트-샤펠이 있어 웅장하고 아름답다. 연간 이 성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14만 명이 넘는다. 명실상부하게 수도권의 명소로 자리 잡은 이 성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홍수로 센 강이 범람할 경우 엘리제궁에 살고 있는 대통령이 대피하는 피난처로 예약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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