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하다 보면 ‘인터넷 연결 없음’이라는 알림이 뜨곤 한다. 원고 작업이든 기사 작성이든 인터넷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기에 잭이 빠졌나 공유기에 문제가 있나 허둥대며 문제 해결에 매달린다.
얼마 전에도 한창 바쁜데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면서 알림 문자가 떴다. 열이 뻗치려는 찰나 뭔가 이상해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주저하고 미안해 하는 듯한 말투였다. 같은 내용임에도 단호하기 그지없는 ‘인터넷 연결 없음’과 전혀 다르게 들렸다.
후자가 “네 잘못이 분명해. 어서 잭을 제대로 꽂든가 공유기를 바꾸든가 해!” 이런 뉘앙스라면 전자는 “인터넷이 안 돼서 속상하지? 왜 안 되는지 잘 확인해 봐. 잭이 빠졌을 수도 있고 공유기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잖아. 다 해 봐도 안 되면 인터넷 기사에게 전화해서 물어봐”로 들렸다. 일종의 뇌피셜이지만 왠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옳은 일에는 단호해도 된다고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옳고 그름이란 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마’가 타락한 천사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천사’는 잠재적인 악마라고 할 수 있다.
꼰대란 나의 선이 절대선이라고 믿는 자다. 선의가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며 악의가 뜻밖의 평화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선과 악은 삶에 종속되어 봉사하는 수단일 뿐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삶의 조건을 무시한 선과 악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의 황금률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한다. 남의 실수에 모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실수는 너그러이 넘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법이다.
살 만한 세상에 산다는 느낌은 살아가는 일 자체보다 중요할 수 있다. 아득바득 이기고 살아 무엇하리. 주저하고 고민하고 여러 번 생각하면 행운을 놓칠지언정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진리는 단호함이나 확실함 속에 깃들지 않는다. 진리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고민할 때 살짝 그 옷깃을 보여 주는 게 진리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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