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89년은 프랑스가 수십 년간 겪어 온 재정 위기와 수많은 반란으로 사회 동요가 심하고 식량 위기에 빠진 시기였다. 여론은 요동쳤고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드 미라보의 영향력은 커지기 시작했다.
제3신분(평민) 대표로 국민의회 의원 출마를 결심한 미라보는 1789년 3월6일 엑스에 도착했다. 마을은 환하게 밝혀졌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열렬히 맞이했다.
“미라보 백작 만세! 조국의 아버지 만세!”
이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미라보는 1783년 이혼을 요구한 아내와의 재판에서 의도치 않게 군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는 프로방스에서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선거가 시작된 후 미라보는 마르세유로 이동해 큰 환영을 받았고, 그곳에서 그는 ‘마르세유 시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해 거물급 라이벌 레이날 신부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또한 엑스에서도 선출됐다. 미라보는 마르세유가 아닌 엑스를 선택했다.
삼부회(귀족·성직자·제3신분) 총회가 열릴 즈음 미라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큰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의회의 회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는 강력한 연극적 자질과 결합된 웅변술 덕분에 주요 연설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웅변력과 논증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단호히 펼쳤고 종종 베르사유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의 웅변술은 귀족 대표인 라파예트 후작에게 대적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역사에 남을 수많은 연설을 했다. 그중 1789년 6월 주드폼 방(테니스코트)에서 한 연설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1789년 봄, 루이 16세는 자신의 정부가 겪고 있던 심각한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개혁을 희망했고 실망스러운 왕권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일부 성직자 및 귀족 대표자들과 동맹을 맺고 1789년 6월17일에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이에 깜짝 놀란 국왕은 의원들이 주로 모이던 무뉘-플레지르 회의실(Hôtel des Menus-Plaisirs)을 폐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의원들은 근처에 있는 주드폼(Jeu de Paume
프랑스 역사의 한 장이 된 베르사유의 주드폼 방은 루이 14세 치하의 운동 연습장이었다. 이곳은 1686년 궁정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실내 테니스코트이다. 테니스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있던 종목으로 왕자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왕실의 오락이었던 테니스는 예의범절과 의례에 의해 성문화됐다. 루브르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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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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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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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피에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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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제르맹 궁전에는 모두 실내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유에는 없었다. 루이 14세는 왕실을 베르사유로 이전한 후 4년 만에 실내 테니스코트를 만들었다. 왕의 주치의는 건강 운동으로 손바닥 마사지를 추천했다. 따라서 궁정 및 왕실 가족들은 이곳을 자주 찾았다.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