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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2> 대학 졸업 1년 차 공작원에게 주어진 대구美문화원 폭파 임무
순발력 좋고 앳된 외모 이철 발탁… 고교생 위장 투입 작전
베테랑 조장과 2인1조로 6개월간 훈련… 동해안으로 침투
반미 의식·투쟁 확산 타고 부산 美문화원 테러 ‘기폭제’ 역할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23 06:30:40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대구미문화원을 폭파함으로써 어렵게 부산에서 시작된 반미 투쟁의 불씨를 대한민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당) 대남공작 전담부서인 연락부에 하달되었다.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남파 공작원들의 준비 정도·공작 임무의 성격과 시급성 여부·남한의 내부 정세 등을 구체적으로 감안해 휴전선과 해상을 통해 직접 침투시키기도 하고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제3국을 통해 우회 침투시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그런데 대구미문화원과 같이 큰 건물을 폭파하려면 상당량의 폭약이 필요하고, 그렇게 많은 폭약은 외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한 공작원이 제3국 여권을 가지고 공항을 통해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남한에 들여올 수 없다. 그래서 대구미문화원 폭파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양의 폭약을 남한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남파 공작원의 직접 침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중앙당 연락부장 정경희와 대남공작 담당 부부장 이명곤은 연락부의 대남 직접 침투 전담과에서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할 만한 남파 공작조를 물색했다. 그러나 해당 임무 수행에 적합한 공작조는 찾을 수 없었다. 남파 공작조는 보통 조장과 조원 2명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에 투입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완성체로서의 2인 공작조가 당시 중앙당 연락부 대남공작과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당 연락부장 정경희와 대남담당 부부장 이명곤은 협의를 거쳐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에 적합한 공작원 2명을 각각 선발해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전담 공작조를 편성하고 임무 수행을 위한 준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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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에 투입되는 공작조의 조장은 국내 침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공작원 가운데 특수 임무에 적합한 인물을 선발하고, 조원은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에 보조적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공작원을 각각 선발한 다음 새로운 남파 공작조를 편성하고 이들에게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부여하기로 하고 남파 공작원들을 상대로 적임자 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위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연락부 대남공작과에 소속되어 있던 남파 공작원 가운데 2명의 인원을 선발했는데, 당시 공작조장으로 선발된 공작원은 40대 중반의 이모(某)였고 조원으로 선발된 공작원은 ‘이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초반의 공작원이었다.
 
공작조장으로 선발된 40대 초반의 이모는 1970년대부터 국내에 여러 번 침투하여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그러나 공작조원으로 선발된 20대 초반의 이철은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한 해인 1982년 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공작원으로 임명된지 불과 1년밖에 안 되는 풋내기였다.
 
흥미있는 사실은 당시 대구미문화원 폭파 공작조의 조원으로 선발된 ‘이철’이라는 인물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제17기 졸업생으로 필자의 2년 선배라는 것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정규과정은 12기부터 시작되었는데 12기~17기까지는 3년제였고 필자의 바로 윗기수인 18기부터 4년제로 바뀌었다. 그래서 필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9기이지만, 4년제로는 2기인 셈이다.
이철은 1979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17기로 입학해 3년을 공부하고 1982년에 졸업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이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졸업 후 공작원으로 활동할 때 만나 보니 가명을 ‘이병호’로 바꿔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한 후 신병 훈련을 마치고 본과에 들어간 1981년 4월부터 그가 대학을 졸업한 시점인 1982년 봄까지 약 1년 동안 같은 중대인 1중대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 이철은 1중대 1소대 소속이었고, 필자는 4소대였다.
 
이철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중앙당 연락부 초대소에서 공작원 생활을 할 때는 물론 2차 침투 후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입학해 다닐 때도 필자와 여러 번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공작조장은 남한에 여러 번 침투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공작조원 이철은 개성 출신이었고 한국말과 문화를 배운 적도 없는 데다 남한에 침투한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남한에 침투하려면 먼저 한국의 말과 문화부터 배워 익히는 ‘적구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중앙당 연락부장 정경희와 대남공작담당 부부장 이명곤이 새내기 공작원 이철을 중차대한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할 공작조의 조원으로 최종 낙점한 데는 그의 탁월한 순발력과 함께 앳된 외모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필자가 만나 본 이철은 유머 감각과 순발력이 남달랐고 165cm가 안 될 정도로 키가 작은 데다 얼굴색이 하얗고 동안이어서 외모를 보면 누구라도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기 때문에 고등학생 교복 차림을 하면 고교생으로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40대 중반의 베테랑 공작원을 공작조장으로 하고 20대 초반의 새내기 공작원 이철을 조원으로 하는 2인 공작조 편성이 확정되었고, 이때부터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공작조는 신분 세탁과 함께 대남 침투 전술·남한에서의 생활·북한과의 통신연락 체계 구축·구체적인 폭파 임무 수행 방법·돌발 상황 발생 시 대응 방안에 이어 북한으로의 복귀에 이르는 대남공작 활동 전 과정에 대한 계획, 즉 액션 플랜을 작성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남 침투를 위한 모의훈련과 함께 대구미문화원 폭파를 가정한 폭파 훈련을 실시했다. 
 
폭파 훈련은 북한의 유명한 폭파 전문가를 데려와 그로부터 폭발물 보관과 운반·폭발물 제조와 실제 폭파 방법 등을 배우고 실행해 보는 방식으로 실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이들은 매일 같이 평양 순안 구역 초대소 지역이 떠나갈 정도로 많은 폭약을 터뜨리면서 실제 폭파 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두뇌가 명석했던 공작조원 이철은 경상도 출신의 강사로부터 경상도말과 함께 한국의 문화·생활방식 등을 속성으로 배워 완벽하게 익혔다.
 
준비 6개월 만에 성공한 대구미문화원 폭파
 
6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을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공작조는 공작선을 타고 동해안을 통해 국내에 침투한 다음 북한에서 계획한 대로 대구로 이동해 대구미문화원을 폭파하는 임무 수행에 돌입했다.
 
당시 이들이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을 위해 구사하려 했던 전술은 고등학생 교복차림을 한 공작조원 이철이 폭발물이 들어 있는 책가방을 들고 대구미문화원 내부로 들어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놓고 나온 다음 일정하게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원격 조종의 방법으로 폭파하는 방식이었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고교생 차림의 조원이 가방을 들고 대구미문화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폭발물이 든 가방을 놔둘 만한 장소가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이에 따라 대구에 도착한 공작조는 디데이(D-day) 며칠 전에 미문화원을 돌아보면서 주변 지리와 도주로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그런 다음 공작조장은 밖에서 기다리고 고교생 차림을 한 조원 이철이 가방을 들고 미문화원에 실제로 들어가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향후 폭발물이 든 가방을 놔둘 만한 장소를 파악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조장과 협의해 최종적으로 폭발물 설치 위치, 즉 가방을 놓아 둘 장소를 결정했다.
 
이와 같이 치밀한 계획과 함께 그에 따른 사전 준비작업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공작조는 이미 계획했던 대로 1983년 9월22일 오후 고등학생 복장을 한 조원이 자연스럽게 폭발물이 든 가방을 들고 대구미문화원에 들어가 이미 지정한 장소에 놔두고 나온 다음 저녁 9시33분경 원격 조종으로 대구미문화원을 폭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구미문화원이 폭파되었을 당시 영남고 1학년이었던 허병철(17세) 군이 사망하고 경찰과 미국문화원 경비원 등 5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5층으로 된 대구미문화원 건물 2층 현관과 도서관이 크게 부서졌다. 그리고 대구미문화원 옆에 있던 대구시교육회 건물 전면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수위실 유리창이 모두 파손되기도 했다.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철 공작조는 미리 확보해 둔 도주로를 따라 현장에서 신속히 이탈해 밤 사이에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은신해 있다가 임무 수행을 위해 남한으로 침투할 때 사용했던 장소인 동해안으로 이동해 침투 시 약속한 복귀 접선 장소에서 안내원들과 접선해 북한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김정일은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공작조장 이모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제1급, 그리고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스위스산 오메가 시계(일명 명함 시계)를 선물로 수여했다. 조원 이철에게는 국기훈장 제1급과 함께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스위스산 오메가 시계를 선물로 수여함과 동시에 노동당 ‘화선입당’ 혜택을 부여했다.
 
화선입당(火線入黨)이란 말 그대로 전쟁이나 전투에서 특별한 공적을 세울 경우 현장에서 곧바로 노동당의 정당원(正黨員)으로 입당시킨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러니까 화선입당을 하면 일반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후보당원 기간(과거에는 1년, 현재는 2년)을 거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1980년대 후반까지 남파 공작원들의 경우 후보당원 기간을 거치지 않고 정당원으로 입당시키는 화선입당 제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 20대 초반의 이철은 노동당원이 아니고 사로청원(현재는 청년동맹원)이었다는 이유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지 못하고 대신 화선입당을 했기 때문에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손해를 본 셈이다.
 
그 후 공작조 조장 이모는 북한 최고위급 노동당 간부를 양성하는 김일성고급당학교(2024년 김정은이 ‘조선노동당 중앙간부학교’로 개칭)에 입학해 공부한 다음 1990년대 초반 자신이 몸담고 있던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구 연락부) 지도원으로 임용되었다. 당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의 담당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공작조장과 달리 공작조원 이철은 중앙당 연락부에 남아 남파 공작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1987년 경 공작조장 김학철(가명)과 함께 2차로 남한에 침투해 공작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북한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북한에 복귀해서는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장 김학철과 함께 조원이었던 이철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그 후 이철은 자신과 함께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했던 이모 공작조장처럼 1990년대 초반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입학해 3년간 공부한 후 대남공작 관련 부서에 배치받았다.
 
돌이켜보면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한 후 북한이 1983년 남파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대구미문화원을 폭파했고, 뒤이어 1985년에는 서울에서 반미 투쟁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이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구체적인 근거로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북한 남파 공작조에 의해 감행된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이 대남공작지도부의 의도대로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싹트기 시작한 반미 의식과 반미 투쟁을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한편, 북한이 감행한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감행하는 북한 김씨 정권의 반인륜적이고 비문명적인 인식과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인륜적이고 반민족적인 북한의 진면모는 뒤에서 서술할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 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김동식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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