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새끼 보좌관의 주요 업무는 문서 수발
대공정책실 부속실장과 부실장은 대개 8시 전후에 출근했다. 이들이 출근하기 전에 간밤의 상황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정리하는 일이 아침나절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보고서 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배포할 것은 복사도 해 놓아야 했다. 낮 동안의 주된 업무는 복사가 금지된 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었다. 모든 보고서는 원칙적으로 복사가 금지됐기 때문에 실장이 다 읽고 나면 재빨리 세 명의 부실장들에게 회람시켰다. 특히 일일 보고서와 메모 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타 부서로부터 문서를 수발하거나 우리 부서의 첩보 보고서를 다른 부서로 전달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수발해야 할 문서 이외에 비공식인 문서 수발의 심부름도 모두 내가 했다. 매주 금요일쯤에는 박성도 정치과장 방에 가서 주례보고를 비공식적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이른바 문서 수발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당시 정치과장이었던 박성도는 이명박 정권에서 국내 정보 담당 차장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새끼 보좌관은 부속실 내의 모든 문서의 수발과 회람‧관리‧파기 등 전 과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대공정책실 부속실은 국내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정보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문건이 많았다.
일일 보고서는 기획판단국에서 생산하여 매일 청와대로 보내는 보고서였다. 메모 보고서는 과학보안국에서 작성하여 대공정책실로 전송한 것을 메모 보좌관이 필사한 보고서였다. 메모 보좌관은 하루 세 차례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림 보고서’는 실장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내가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부속실 식구들… 보좌관‧새끼 보좌관‧여직원과 메모 보좌관
대공정책실 부속실에는 모두 네 명이 근무했다. 나 이외에 보좌관과 여직원, 그리고 메모 보좌관이 있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울 때는 내가 보좌관 업무도 대신해야 했다. 보좌관은 이용○라는 선배였는데, 그는 기획판단국에서 분석업무를 하다 인천지부로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오 실장을 만나 다시 대공정책실로 따라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는 오 실장의 고려대 후배라서 그런지 오 실장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센스와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메모 보좌관은 배충○이라는 분이었는데, 정치과 기획관을 하다가 옮겨 왔다. 메모 보좌관을 거치면 대개 과장으로 진급시켜 주는 분위기였다. 그는 베테랑 정보원으로, 대한민국 정치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배 보좌관은 나에게 고마운 분이다. 회사 생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마음을 많이 써 주었다. 그는 지난번 미림 사건으로 인해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지면을 빌려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부속실 전화교환원은 일종의 ‘전문직’
부속실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장의 전화를 연결해 주는 일이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전화를 연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전화를 연결하는 일은 섬세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전문직이었다. 나는 한동안 전화교환원 노릇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전화교환원의 자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수화기를 들면 상대방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감각적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어눌한 언변도 이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한번은 퇴근 직전에 외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어이!”라고 한마디하고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즉각적인 사태 파악이 안 되어 조금 버벅댔는데, 그러다가 된통 크게 깨졌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오정소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내 목소리도 분간하지 못하냐”며 야단을 쳤다.
전화를 연결해 주는 상대방의 권력관계에 따라 누구를 먼저 바꿔 주어야 하는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물론 권력 서열이 낮은 당사자가 먼저 받도록 하는 게 노하우였다. 이 문제로 전화 상대방의 보좌관과 머리싸움을 하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권력 순위라는 게 단순히 ‘정부 직제상의 순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더했다. 때때로 정무적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상대방을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몇 발자국을 옮길 것인가를 초 단위까지 계산했다가 연결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도 살 떨리는 스트레스였다. 한마디로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오정소 부속실장은 문민정부의 ‘넘버 쓰리’
내가 부속실에서 상관으로 모셨던 오정소 실장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 실장을 문민정부의 아이콘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문민정부의 핵심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는 문민정부의 막후 핵심 실세였던 김현철 씨와 고등학교와 대학(고려대 사학과) 동창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YS) 대통령은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점에서 양 김씨는 크게 대조된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이름을 불러 주면 최측근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가령 YS가 “영춘아, 오늘 나랑 조깅하자”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 김영춘 의원이 금방 최측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한번은 김 대통령이 서울시를 순시하면서 “정소는 어디 갔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러자 금세 “오정소가 최고 실세”라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오 실장은 YS 정권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90년대 말, 주먹의 세계를 해학적으로 그려낸 ‘넘버 쓰리’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좀 억지이긴 하지만 오 실장은 ‘문민정부의 넘버 쓰리’에 비유될 만했다. 물론 문민 정권의 ‘재떨이’는 이원종 수석 정도가 될 것 같다.
문민정부 초기 안기부 내에서는 오 실장과 황창평 차장이 실세였다. 그들에 비해 김덕 원장은 학자 출신이라 그런지 정보기관장답지 못했다. 그는 정보기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조직을 장악하는 데도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노란 봉투 사건’의 주인공 황창평 차장
황 차장과 오 실장은 서로 잘 통했다. 아마 고려대 동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오 실장과 황 차장은 문민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특히 황 차장은 이른바 ‘노란 봉투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노란 봉투 사건’이란 노태우 정권 말년에 YS가 소위 노란 봉투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과 정면승부를 벌인 사건이다. 봉투 안에는 “안기부가 YS를 뒷조사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 사건은 YS가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해 후계 권력을 접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창평 기판국장이 문제의 노란 봉투를 YS 측에 건네줬다”고 한다. 확인된 얘기는 아니었지만 분위기상으로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닌 듯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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