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문민정부의 연예계 사정, 국민의 정부도 재현
신곡 소개의 대가로 곡당 2~300만 원을 받아 챙긴 DJ에 대해 몇 달간 진행된 검찰의 수사는 결국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되었다. 수사에 불려 나온 연예인들 진술의 신빙성도 문제거니와 설령 진술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범죄성을 입증할 물증을 잡기 어려웠다. 정권으로서도 한바탕 보도했기 때문에 내심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민정부에서 행해진 연예계 사정이라는 클래식한 레퍼토리는 2002년 국민의정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바 있다. 사정을 시작한 동기도 붕어빵처럼 똑같았고, 진행 과정과 결말도 대략 그저 그렇게 비슷했다. 아무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인터넷 보급에 공헌한 ‘O양 비디오’
국정원과 연예계가 관계되는 얘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건으로 알려진 소위 ‘O양의 비디오’ 사건에 얽힌 얘기다. 직접 확인한 일은 아니지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대충 다음과 같다.
국정원이 이 사건에 개입한 사연은 좀 우스꽝스럽다. 비디오에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종마처럼 잘빠진 H씨는 마약 중독자였다고 한다. 모델이자 디스크자키였다고 알려진 그는 O양이 뜨기 전에 매니저 겸 애인이었는데 훗날에 대비해 문제의 비디오를 찍어 두었다고 한다.
한참 후 그는 O양과 헤어지고 돈이 궁해지자 이 비디오를 가지고 한국의 모 대형교회 당회장의 아들인 J씨를 협박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O양이 J씨의 애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협박을 당한 J씨는 처음 한두 차례는 돈을 줄 수밖에 없었지만 계속되는 협박에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이즈음 이종찬 국정원장은 J씨가 운영하는 모 일간지 담당 수집관에게 이 비디오의 원본 입수를 지시했다. 당시 그 일간지 담당 수집관은 내가 신문과에 부임했을 때 행정관이었던 윤모 선배였다.
이종찬 원장과 J씨의 부친과는 평소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 수집관이 비디오 원본을 입수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퍼져서 유포를 막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대충 그렇고 그런 스토리였다.
“이제 국내 부서는 사양 산업”… 하산할 결심
대공정책실 부속실에서 1년 정도 일하고 나니 ‘볼 것 안 볼 것 다 보았다.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긴장된 부속실 생활로 몸도 마음도 많이 피폐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을 핑계로 가정에도 너무 소홀해진 것 같았다. 나는 좀 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는 오래 있을 데가 못 된다”고 충고해 줬다. 메모 보좌관이었던 배모 보좌관은 “이젠 국내 부서는 사양산업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외 부서로 옮겨라”며 진심으로 충고해 주었다. 고민이 되었다.
이즈음 나는 ‘나의 성격이 국내 부서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애초에 정성○ 씨나 공운○ 씨 같은 훌륭한(?) 수집관이 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해외연수도 가고 싶었다. 연수를 가려면 아무래도 국내 부서보다는 해외 부서로 옮기는 것이 유리했다. 생각 끝에 오 실장에게 “부속실 일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해외 부서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오 실장은 별다른 군말 없이 “원하는 부서로 보내 주마”고 승낙해 주었다.
해외공작국의 핵심 북미과… 과중한 업무에 살벌한 분위기
1995년 2월 어느 날, 해외공작국의 이병○ 행정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게 “아주과에서 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해외공작국 아주과는 젊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과의 분위기가 괜찮았고, 업무량도 적당했다. 다른 과에 비해 해외 파견관으로 나갈 기회가 일찍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해외공작국의 핵심 과는 북미과였다. 하지만 나는 공작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북미과는 과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라 처음부터 아예 북미과로 갈 마음은 없었다. 나중에 실제로 해외공작국에 가서 살펴보니‘북미과에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북미과는 업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의 분위기도 살벌했다.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북미과 직원들은 하루 종일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살았다. 사무실 내에서 과원들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나는 정보협력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라서 해외공작국의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당시는 기존의 해외 정보 수집 방식에서 탈피해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 협력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이병○ 과장에게 “정보협력과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안기부의 실세 ‘고대 3인방’
며칠 후 해외공작국의 정영○ 국장에게 정식으로 전입신고를 하러 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네가 김기삼이냐?”라고 말했다. 첫인사치고는 뉘앙스가 좀 묘했다. ‘오정소 실장의 직접 부탁으로 전입해 온 녀석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너였구나!’라는 투였다.
당시 안기부 내에서는 고대 삼인방이 이른바 실세였다. 오정소‧정영○‧남영식 실장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국내와 해외, 그리고 대북 수집부서의 부서장들이었다. 이들이 국정원의 핵심 꽃보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연배도 비슷한 데다 젊은 시절부터 해외공작국에서 동고동락했던 친구 사이인지라 서로 잘 어울리고 협조도 잘했다. ‘밀어 주고 끌어 주는’ 고대 정신에도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오 실장은 그 후 국내 차장으로 먼저 승진했고, 남 실장은 황장엽의 망명을 막후에서 직접 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차장급인 특보로 승진했다. 정영○ 국장은 차장으로 승진하지는 못했지만 정권이 바뀌고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살아남았다.
신○○해외공작국 정보협력과장
나는 해외공작국 정보협력과 3계에 배속되었다. 당시 해외공작곡 정보협력과장은 신○○이란 분이었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해외공작국장을 지내고 그 후 아시아 어느 나라의 대사로 나갔다. 신 과장은 나의 안기부‧국정원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해외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주로 외국 정보기관에 제공할 정보협력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통역 업무를 조정하는 일이었다. 정보협력과 3계에는 한국외국어대학 동시통역대학원 출신의 전문 통역사가 여러 명 있었다. 나는 이들 전문직 직원들의 번역과 통역 일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또한 일주일마다 타국 정보기관과 교류한 정보협력 실적을 종합하여 실장에게 보고하는 일도 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각 과에 연락해 한 주 동안의 정보협력 실적을 파악했다. 이런 일을 통해 외국 정보기관과 무엇을 어떻게 협력하고 어떤 자료를 주고받는지를 전체적으로 대충 조감할 수 있었다. 안기부와 외국 정보기관과의 관계가 대충 눈에 들어왔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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