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楚漢)전쟁의 시발점은 항우(項羽)의 초 의제(義帝) 시해였다. 의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기치로 거병한 유방(劉邦)은 절망적 열세였으나 한 싸움에서 천하를 얻게 된다.
진(秦)나라의 폭정으로 백성이 신음하자 옛 육국(六國)이 부활해 반기를 들었다. 항량(項梁)은 초나라 왕손 웅심(熊心)을 찾아내 회왕(懷王)에 추대했다. 나머지 나라들은 초나라를 중심으로 진나라에 맞섰다. 항량 사후 마침내 진나라가 무너지자 항우는 웅심을 의제로 높였다.
실권은 항우에게 있었다. 그는 제 손으로 제후들을 분봉하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에 봉했다. 또 황제의 충신들을 산간벽지로 쫓아내 웅심의 수족을 잘랐다. 한중(漢中)·파촉(巴蜀) 지역을 임지로 받은 한왕(漢王) 유방도 추방자 중 하나였다. 웅심이 허수아비 황제가 되자 항우는 목숨을 노렸다. 웅심은 항우의 밀명을 받은 영포(英布)에 의해 눈 감고 만다.
제후들을 규합한 유방은 56만 대군을 휘몰아 항우를 쳤다. 처음엔 서초의 수도 팽성(彭城)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제(齊)나라에 원정 중이던 항우는 불과 3만의 병력으로 반격해 유방을 깔끔히 박살냈다. 제후의 대다수는 항우에게 투항했다. 항우의 세력은 산(山)을 뽑을 정도로 커졌다.
겨우 재기한 유방은 대전략을 세웠다. 자신이 직접 항우를 막는 사이에 대장군 한신(韓信)이 배반한 제후들을 공격해 세력을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구강왕(九江王) 영포 등을 포섭하기로 했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나면 자신과 한신과 영포 등이 항우를 포위해 사면초가(四面楚歌) 형국에 몰아넣어 끝장낸다는 게 유방의 계획이었다.
말은 쉬웠다. 주둔지는 끝내 점령됐으며 유방은 기신(紀信)의 희생으로 겨우 달아났다. 유방으로 변장한 기신은 항우가 자신을 뒤쫓도록 했다.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유방은 재차 맞섰으나 또다시 깨강정이 됐다. 항우는 앞을 막아선 주가(周苛)를 삶아 죽였다. 유방은 한신의 군영으로 간신히 도망쳤다.
그러나 항우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유방의 대전략은 완성됐다. 설상가상 항우는 유방 측의 계책으로 책사 범증(范增)마저 잃었다.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 집결한 영웅들은 마침내 항우를 무찔렀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쟁패 끝에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후대 400년 집권의 기반을 닦았다.
대통령이 파면되고 대선의 시간이 다가왔다. 유방은 치밀한 전략 끝에 한 싸움에서 의제의 원수를 갚고 나아가 천하를 얻었다. 그날의 장면이 2025년 대한민국에서 재현될지 주목된다.
오주한 정치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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