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매복 공작에서 단기 공작으로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적구화 교육뿐만 아니라 남파 공작원들이 국내에 침투해 실제로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공작 활동 기간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공작원이 남한에 침투한 후 장기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거점을 구축하고 호적을 취득함으로써 완벽한 한국인으로 신분을 세탁한 다음 활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부산 청사포 침투 사건 발생 당시 국내에 침투했던 남파 공작조는 무려 2년간 위조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호적도 없이 장기간 잠복해 활동하다가 무사히 복귀한 것이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들의 경험을 통해 위조 주민등록증으로도 충분히 장기간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남파 공작원들이 남한에서 장기간 공작 활동을 벌이기 위해 반드시 호적을 취득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는 공작원들이 남한에 침투한 후 호적을 취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하지 않고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 방법에 대해서만 연구하면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남 공작 전술 변화 후 남한에 침투하는 남파 공작조의 경우 위조 주민등록증을 휴대한 상태에서 짧게는 1~2개월, 조금 길면 6개월~1년 정도 활동하다가 북한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리영희 같은 사람은 포섭할 필요가 없다
당시 북한 대남공작부서 내부에서는 주사파를 비롯한 국내 운동권 인물들을 포섭하는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무엇보다도 국내 운동권 인물들 가운데 유명 인사들을 포섭할 것이냐, 아니면 포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것이 대남 혁명을 위해 이로운 것이냐의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거론되었던 인물이 당시 한양대학교 교수였던 리영희였다. 본인이 두음법칙대로 쓰지 않고 ‘리영희’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뜻을 존중해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을 넘어서’ ‘8억 인과의 대화’ 같은 저서를 통해 국내 운동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논의 끝에 “리영희와 같은 유명 인사는 포섭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내세웠던 논리는 “우리가 특정인을 포섭하려는 것은 그를 노동당에 입당시킨 다음 노동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리영희와 같은 인물은 포섭하지 않고 그냥 놔두어도 우리가 의도하는대로 잘하고 있으니 굳이 포섭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을 포섭해 노동당에 입당시키면 오히려 스스로 신분이 노출될까 봐 부담스러워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차라리 포섭하지 말고 원래대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는 것이 대남 혁명을 위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노동당 간부들이 경청한 리영희의 기고문
물론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북한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에서는 1990년대 초반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리영희가 ‘말’지에 기고한 글을 노동당 간부 대상 강연 자료로 이용하기도 했다.
북한에는 ‘녹음 강연’이라는 형식의 강연을 하는데, 이는 강연자가 직접 단상에 서서 하는 일반 강연과 달리 아나운서가 감정을 넣어 강연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그대로 녹음한 다음 스피커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선전 선동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의 강연이다. 리영희의 기고문도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녹음한 다음 노동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녹음 강연을 진행했다.
사실 당시 북한에서 노동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일반 강연도 아니고 녹음 강연을 진행한다는 것은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나 허락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리영희의 기고문을 녹음 강연 형식으로 노동당 간부들에게 소개했다는 것은 그의 글이 북한의 입맛에 맞는 정도를 넘어 김정일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포섭 대상에게 권총과 무전기를 보여준 남파 공작조
당시 논의되었던 또 하나의 쟁점은 남파 공작원들이 국내에 침투해 주사파 등 운동권 인물들을 포섭하는 과정에 그들이 북한에서 남파된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할 경우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국내에서 활동하던 남파 공작조가 특정 인물을 포섭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포섭 대상이 ‘북한에서 왔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파 공작조는 자신들이 북한에서 남파된 공작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 몰래 묻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가지고 가서 보여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위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일부에서는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증거로 ‘소지하고 있는 무전기나 권총 등을 보여주자’고 하는 등 많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적절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한마디로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공작지도부와 남파 공작조가 남파되기 전에 약속한 ‘문장(멘트)’을 내보내고 그것을 청취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확인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를 공작 용어로 ‘담보 방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포섭 대상이 남파 공작원에게 “당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는 경우 자신 있게 “내가 북한에서 남파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겠다”고 대답한 다음 북한 공작지도부에 무전으로 이미 약속된 담보 방송을 내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담보 방송 문장의 내용은 대체로 “평양에 사는 홍길동(누가)이 서울에 사는 성춘향(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정에 의해 보내 드리지 못합니다”와 같은 것이었다. 요청을 받은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남파 공작조에 담보 방송을 내보내는 날짜와 시간 등을 알려 준다.
이를 확인한 남파 공작조에서는 포섭 대상에게 담보 방송이 나오는 방송명(평양방송)과 주파수(단파 6400㎑·중파 657㎑), 방송이 나오는 날짜와 시간, 절차, 문장(멘트) 내용 등을 자세하게 알려 준 다음 해당 일자에 확인하도록 하고, 확인 후 접촉 일정을 다시 약속하는 방식이다.
본격적인 대남 공작 시작과 의식화 공작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간첩사건 이후 뚜렷한 성과 없이 예전에 구축해 놓았던 크고 작은 지하당 조직(간첩망)들이 연이어 노출, 파괴되면서 사실상 소강 국면에 들어섰던 북한의 대남 공작이 다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 북한의 대남 공작이 활기를 띠고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에서의 민주화 실현과 자생적인 주사파 등장, 그리고 북한의 성공적인 대남 공작원 세대 교체 및 공작 역량 강화 조치, 공격적인 포섭 전술로의 변화 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대남 공작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 국민을 친북 세력화하고 주사파로 만들기 위한 의식화 공작이었고, 두 번째는 주사파를 비롯한 국내 운동권 인물들을 직접 접촉해 포섭한 다음 노동당에 입당시켜 지하당 조직(간첩망)을 구축하는 조직화 공작이었다.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의 의식화 공작
먼저 의식화 공작에 대해 살펴보자.
북한은 남한의 청년·학생은 물론 일반 주민까지 의식화하기 위해 당시 국내 운동권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이념 논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직접 뛰어들었다. 물론 북한은 과거에도 진취성이 강한 청년·대학생들과 젊은 지식인들을 의식화하기 위해 대남 침투 요원들의 배낭에 김일성 노작을 비롯한 북한 원전들을 한가득 넣고 나와 야밤을 틈타 각 대학에 몰래 숨어든 다음 대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강의실 책상 서랍과 교수연구실에 대량으로 넣어 놓고 복귀하는 행위를 감행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국내 운동권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던 주사파(NL)와 비주사파(PD) 간의 이념 논쟁에서 주사파가 승리할 수 있도록 이면에서 북한 공작지도부가 직접 이념 서적을 제작해 국내에 배포하는 공작을 전개했다.
북한에서 만든 이념 서적… 국내 출판물로 둔갑시켜 배포
북한에서 이념 서적을 만들어 국내에 배포하는 방법과 절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대남공작부서에서 북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대학교수·연구원 등 이론가·전략가들로 집필팀을 구성한 다음 이들에게 이념 서적 원고 작성 방향을 제시하고 임무를 부여해 원고를 작성하도록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념 서적 원고 작성에 동원된 학자·전문가들이 모두 북한 출신이기 때문에 문장의 구성이나 표현 등이 모두 북한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출신 전문가들에 의한 이념 서적 원고 집필이 끝난 다음에는 남한 출신으로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휴전선에서 군에 복무하다 자진 월북한 월북자·납북자 가운데 관련 분야에 정통한 지식인·전문가들을 불러 북한 출신 학자들이 작성한 원고를 한국식 문장과 표현으로 모두 바꾸도록 한다. 그런 다음 두 그룹이 모여 한국식으로 바꾼 문장이나 표현 등이 적절한 것인지 평가하고 보완한 다음 최종 편집해 원고를 완성한다.
완성된 원고는 중앙당 통일전선부 산하 인쇄소에 보내 그곳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 이름과 주소지 등을 기재하는 수법으로 한국에서 출판한 책자와 똑같이 만들어 일본이나 유럽 등 해외 공작 거점으로 보낸다. 해외 공작 거점에서는 해당 국가를 방문하는 국내 고정 간첩이나 운동권 인사들에게 그것을 전달해 그들이 국내로 가지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국내에 몰래 가지고 들어온 이념 서적은 믿을 만한 인쇄소에 맡겨 비밀리에 대량으로 제작한 다음 각종 운동권 조직과 인물들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북한이 제작해 국내에 몰래 배포한 대표적인 이념 서적이 ‘한국사회 성격 논의’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 ‘주체의 한국사회 변혁 운동론’ 등이다. 이 가운데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과 ‘주체의 한국사회 변혁 운동론’ 등 2가지 이념 서적은 필자가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 생활할 때 실제로 본 적도 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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