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착한 도서관 아가씨
간부 현실체험을 하는 기간에는 도당 초대소에서 생활하다 보니 도당에서 업무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도당 초대소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퇴근 후 혼자 지내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초대소에 있는 책은 볼 만한 것이 없어 도당 청사 내에 있는 도서실에 책을 빌리러 갔다.
도서실에 들어가니 아가씨가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정말 미인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인사만 나누고 책을 빌려 왔는데, 그 후에 여러 번 책을 빌려 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친숙해지게 되었다.
마음씨 고운 두 살 연상의 그녀
그의 이름은 강영숙이었고,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외국어학원을 졸업해 외국어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도당에 소환된 후 처녀로서는 쉽지 않은 노동당 입당까지 한 아가씨였다. 아버지는 대좌(대령)로 군복무를 하다가 만기 제대해 평양에 살고 있었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대학을 나와 평양에 살고 있었다. 평양시 안전국(현재 보안국)에서 근무하는 오빠도 있었고, 구역당 조직부 부부장으로 있는 오빠도 있었다. 마음씨도 착했는데 고향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다 갈 때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과 노트를 내 동생들에게 챙겨 주는 등 굉장히 신경을 써 주었다.
당시 그는 내 직업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내 나이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날이 갈수록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지고 나를 대하는 감정이나 느낌도 변해 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초대소 요리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내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오기까지 했다.
서로의 마음 확인하며 이별 통보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그의 마음에 상처만 남겨 줄 것 같아 일단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불러내 내 생각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내 생각에 너는 지금 단순히 나를 좋아하던 단계를 넘어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이런 내 생각이 지나친 비약은 아니야?”
그로부터 내 생각이 맞다는 대답을 듣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네가 좋아. 물론 처음에 너를 좋아했던 감정은 순수한 것이었고 그것이 사랑인지는 나도 몰랐어. 사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과연 생길까 싶은 마음이 컸어. 그런데 오늘 ‘강영숙’이라는 한 여성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 역시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너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 관계는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친구 사이로 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물론 사랑하는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그 누구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새겨듣고 판단은 네가 해.
현실의 벽… 두 살 연하의 공작원 신분
왜 우리 관계가 앞으로도 친구 관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을지 그 이유를 말하자면, 우선 내 나이가 너보다 어리기 때문이야. 물론 나이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네가 지금까지 내가 너보다 어리다는 것을 몰랐다는 거야. 너는 지금 당장 결혼해야 하는 나이(28세)지만 나는 아예 결혼이라는 것을 못 할지도 몰라. 내 나이 겨우 20대 중반인데 이왕 들어선 길인데 결혼보다는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야.
이런 내 결심이 언제 실현될 건지 모르고, 또 그 과정에서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혼보다는 친구 관계로 너와 지내고 싶어. 이런 조건에서 너에게 언제까지나 기다리라고 하면서 내 욕심만 차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 심지어 앞으로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고 항상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보장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 흔한 연애소설 한 번 읽어 본 적 없고 그렇다고 미리 머릿속에 대화 내용을 생각해서 나간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말이 잘 이어졌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의 태도는 대단히 냉정하고 단호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처음에는 약간 눈물을 흘리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서는 한두 마디씩 질문도 하면서 내 말을 마지막까지 다 들어 주었다.
평양 초대소로 철수… 그녀의 마지막 편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 사랑하는 감정은 그 누구의 요구나 강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고, 또 그런 감정을 느끼고 안 느끼고 하는 것도 모두 자유이니 본인이 나를 사랑하는 감정을 갖고 안 갖고 하는 것 역시 자기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도당 청사 내에 있는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부담 없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간부 현실체험을 마치고 평양에 있는 초대소로 철수해 돌아오게 되었다. 내가 평성을 떠나올 때 그는 초대소에 돌아가서 보라면서 봉인한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초대소에 도착해 봉투를 뜯어 보니 그 안에는 여러 장으로 된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결혼할 운명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앞으로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자기는 나를 보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으니 너무 아쉽다면서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7년이 지난 1994년 여름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평양에 사는 장교와 결혼해서 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던 그때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면서 두 사람 다 평양 시내에 살고 있으니 만날 수 있겠다면서 기뻐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에는 시간도 없고 여건도 허락되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양주 3병에 취하다
간부 현실체험 기간에는 중앙당·도당 고위 간부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기회도 가끔 있었다. 신정 때는 내가 있던 초대소로 중앙당 연락부 담당 지도원과 평남도당 조직비서·조직부장·간부부장과 대남요원 가족 지원을 담당하는 11과 부부장 등 도당 고위급 간부들을 초대해 그들과 식사를 한 적도 있다.
그때 도당 간부들은 담당 지역인 평안남도에서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도 좋은 술이라고 소문난 양덕술을 가져왔는데, 알콜 도수가 40도가 넘어 양주만큼 독한 술이었다. 그 이전에도 술은 마셔 본 적이 있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도수 높은 술을 많이 마셔 보았다. 간부들이 돌아가면서 한 잔씩 권하는 통에 그때 마신 술이 3병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양주 3병을 마신 셈이다.
그래도 취해 넘어지지 않고 왔던 손님들을 모두 정중히 보내드린 다음 침대에 누웠는데, 6시간 후에야 비로소 깨어났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그 ‘자랑스러운 명예’를 지키느라 오랫동안 고역을 치러야 했다.
대합조개와 휘발유·가마니 한 장… ‘조개 불고기’
한번은 평안남도 평원 바닷가에 가서 대합(백합) 구이를 처음으로 해 먹은 적도 있다. 일명 ‘조개 불고기’라고도 하는데, 대합조개와 휘발유, 가마니 한 장만 있으면 되고 방법도 비교적 간단해 어디서나 쉽게 해 먹을 수 있다.
먼저 가마니에 불이 붙지 않게 가마니를 물에 푹 적셔서 편 다음, 그 위에 대합조개 입이 하늘로 향하도록 촘촘히 세워 놓는다. 다음 대합조개 위에 휘발유를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 조금씩 뿌리면서 불을 붙인다. 이때 한 번에 많은 양의 휘발유를 뿌리면 조개가 타거나 익은 다음에도 냄새가 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조금씩 뿌려야 한다. 그래서 휘발유를 병에 담은 다음 솔잎 같은 것으로 막든가 병마개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여러 개 뚫어 조금씩 떨어지게 한다.
조개가 익으면 입이 벌어지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 조절해 휘발유 뿌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 조개 입이 벌어졌는데도 계속해서 휘발유를 뿌리면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불이 꺼지면 장갑을 끼고 까먹으면 되는데, 냄새도 거의 나지 않을 뿐더러 참으로 담백하고 맛이 있다. 이런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 취하지도 않고 엄청 많이 마실 수 있다. 당시 내가 먹고 내려놓은 조개 껍질을 세어 보니 70개 쯤 먹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7개월간의 간부 현실체험을 마감하고 1988년 4월 중순 평양시 순안 구역에 있는 북대천 10호 초대소로 돌아왔다. 이 초대소는 원래 있던 화대천 1호 초대소에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60대의 아주머니가 요리사로 있었다. 이 초대소에 약 한 달간 있으면서 사로청 간부 현실체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담당 부부장과 과장·지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보고서를 발표한 뒤 간부들이 평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우리가 처음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아버지가 제주 서귀포 해안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는 많은 설명을 해 주셨어요.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온통 제주의 푸른 바다와 검은 화강암, 그리고 맛있는 먹거리 등에만 정신이 팔려 아버지의 설명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제주에 갔었지만, 마지막 전역 전 휴가로 아버지와 갔던 여행에서야 제대로 아버지의 발자취들을 따라 돌며 그때의 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 KAL호텔, 그리고 성산읍 온평리 ‘해녀의 집’까지….
자식인 저희들에게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 텐데, 동생과 제게 이야기하신 후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아버지 : 우리가 제주도로 여행 갔을 때 너희들에게 내가 해 온 일들과 함께 현장을 보여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예전에 북한에서 태어나 공작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남한에 침투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과거에 했던 일이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숨길 이유도 없었어.
그래서 차라리 너희들에게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어렴풋하게 책이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이해하라고 현장에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었던 거야. 다행히도 너희들이 거부감 없이 아버지의 과거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줘서 고마울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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