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王莽)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이다. 포퓰리즘 등으로 ‘어제망(어차피 황제는 왕망)’에 성공했으나 한계에 봉착해 ‘왕망(왕창 망)’하게 된다.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이었다. 백부인 대장군 왕봉(王鳳)을 등에 업고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지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거만히 구는 대신 겸손한 척, 검소한 척하면서 착실한 이미지도 쌓아 갔다. 백관들이 왕망 아내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노비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왕망은 차남 왕획(王獲)이 사람들을 해치자 자결을 명하기도 했다.
왕망은 물밑에서는 착실히 권력 다졌다. 황제였던 애제(哀帝)는 기원전 1년 붕어했다. 왕망은 옥새를 강탈한 뒤 아홉 살에 불과한 중산왕(中山王) 유기자(劉箕子)를 평제(平帝)에 추대했다.
여론조작·선전선동도 일삼았다. 평제 취임 후 월상씨(越裳氏·지금의 베트남 지역에 있던 나라)가 전한 조정에 흰 꿩을 바쳤다. 과거 주(周)나라의 젖먹이 임금 성왕(成王) 즉위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주공 단(旦)의 섭정으로 천하가 태평해지자 월상씨는 흰 꿩을 진상했다. 주공 단은 가장 이상적인 성인으로 받들어진 인물이었다. 왕망 주변 사람들은 상전을 주공 단에 견주면서 안한공(安漢公)에 봉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미지 세탁’은 여전했다. 왕망은 온갖 겸손을 떤 뒤에야 “지엄한 황명을 어길 수 없다”는 듯 감투를 냉큼 챙겼다. 포퓰리즘·금권정치도 만연했다. 왕망은 억만금을 털어 백성에게 나눠 주며 지지율을 올렸다. 주변을 시켜 “왕망의 섭정으로 송사도, 도적도, 빈민도 없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제가 의문사하자 왕망은 황손 유영(劉嬰)을 황태자에 봉했다. 공교롭게도 황태자가 취임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맹통(孟通)이란 자가 우물을 파다가 얻었다며 흰 돌을 바쳤다. 돌에는 “안한공은 천자(天子)가 되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왕망은 가황제(假皇帝)·섭황제(攝皇帝)에 취임했다. 그는 어린 황태자의 손을 쥐고 눈물 콧물 다 짜며 “천명을 어길 수 없다”고 짐짓 한탄한 뒤 끝내 선양(禪讓) 받아 신(新)나라를 세웠다.
대권을 거머쥔 왕망은 본색을 드러내 폭정을 일삼았다. 개혁이라며 추진한 정책들은 부작용만 야기했다. 무능력자의 여론조작·포퓰리즘 정치에는 한계도 따랐다. 신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서적 ‘왕망-명분과 속임수 사이’는 신나라의 단명 이유로 포퓰리즘 등을 꼽았다.
왕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는 포퓰리즘 등 논란의 중심에 있는 모 정당을 떠올리게 한다. 그 관계자들에게 왕망의 최후를 곱씹어 보기를 권한다.
오주한 정치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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