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지방 대도시 정도는 알아야 한다
적구화 교육 강사들은 서울과 부산·대구 등 지방 대도시의 자연·지리적 특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우선 내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고 강사 역시 서울 출신이라서 서울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 다른 지역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서울의 지리에 대해서는 서울 토박이 정도는 아니지만 대체적인 윤곽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서 길을 잃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 있다.
부산엔 돈이 많고 대구엔 미인이 많다
아울러 부산과 대구에 대해서도 배웠다. 당시 들었던 내용 가운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우선 부산에는 3가지가 많다는 것이었다. 즉 부산에는 물보다 술이 많고, 종이보다 돈이 많으며 여자보다 아가씨가 많다는 것이었다. 자갈치시장 회가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아가씨들이 사과를 많이 먹어서 미인이 많다는 것, 곰탕을 잘하는 현풍할매곰탕이 유명하다는 것 등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배웠던 것들이어서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진 것도 있고, 일부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후에 남한 자료를 보면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여기에 적은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관련한 적구화 교육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화 교육 기간에 사상이론 학습이나 강연 등을 일절 중단하고 훈련도 일시적으로 중지한 상태에서 오직 적구화 교육에만 집중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당생활 총화와 함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운동 정도는 하게 한다.
금강산 관광 때부터 꼬인 관계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여러 가지 일도 많았다.
조장 김명걸과 함께 적구화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해 가을, 서울말 강사 박 선생과 함께 또다시 금강산관광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담당지도원과 박 선생, 나와 조장 김명걸 등 우리 일행은 금강산 관광을 마칠 즈음 해금강 지역에 갔었다. 원래 그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군(軍)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얻어 해금강에서 관광도 하고 해산물을 채취해 어죽을 쑤어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금강은 정말 몇 마디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이었고 바다에는 홍합과 해삼 등 해산물도 얼마나 풍부한지 모른다. 그날 우리는 해금강에 간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회와 어죽도 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내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곳 군인들과 함께 주정 농도가 40도인 개성 인삼주 3병을 마시고 만취되어 백사장에 누워서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필름이 끊긴 것이었다.
잠에 취해 투덜거린 게 화근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 일행이 해금강을 출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김명걸이 내게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왜 무시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오히려 “왜 그러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제야 자초지종 이유를 이야기했다.
내가 한참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김명걸이 나를 깨워 카드놀이를 하겠다며 카드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카드놀이를 하려면 할 사람들이 가져다 하지 왜 자는 사람을 귀찮게 깨우면서 그러느냐”고 투덜대고는 그냥 누워서 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술을 많이 마시고 자다가 잠결에 한 말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자다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필름이 끊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내가 실수했다고 판단하고 솔직하게 “술에 취해서 무의식중에 한 실수이니 양해해 달라.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며 내 사과를 받아 주는 것처럼 하고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내 실수를 들먹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괴롭혔다.
약속 어기고 적반하장으로 충성심 들먹여
그 앙금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후에도 가시지 않았던지 김일성·김정일에게 보내는 축전을 작성할 때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축전은 원래 초안을 써서 지도원들에게 검사받은 다음 최종적으로 깨끗이 정성스럽게 써서 제출하는데, 처음 초안을 작성할 때는 글씨를 그다지 잘 쓰지 않아도 된다. 북한에서는 정성을 다해 곱게 쓰는 것, 정자로 글을 쓰는 것을 정서(正書)라고 한다.
김명걸은 자기 글씨체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초안을 쓸 테니 자기보다 글씨체가 나은 내가 정서를 하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작성하기로 한 초안부터 마지막 정서까지를 통째로 내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안은 글씨를 알아볼 정도로 쓰면 되고, 이미 조장이 초안을 쓰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정서는 약속대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내게 충성심이 없다고 하면서 단순한 절차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걸고 들었다. 여기에 나도 질세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지 말라며 “당신은 약속도 안 지키고 여자들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래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김명걸은 이때에도 담당 부서에 제의해 당장 공작조를 해체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부서에 전화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어서 전화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자 제풀에 취소했다. 이 일은 그 후 내가 술을 같이 마시며 화해하자고 해서 넘어갔다.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에게 차인 김 조장
이런 와중에 김명걸과 수개월 전부터 사귀던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눈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한 공작원은 1985년 가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1987년 말경에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2인 공작조의 조원 박모 씨였다.
사실 김명걸은 그때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 남파 공작 임무를 받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운이 나쁘면 남한에 침투했다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그 접대원 아가씨로서는 이미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까지 받아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남자를 선택할 만도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 아가씨가 김명걸을 차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졌다.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고민하더니 자기가 사귀던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결혼한 것, 본인이 화가 난 것 등 모두가 내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에 나도 모르게 담당 부서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동에서 뺨 맞고 서쪽에 눈 흘기기… 조장의 옹졸한 화풀이
그는 내 성격이 까다롭고 조장인 자기 말도 잘 안 들어서 나와 같이 일을 못 하겠다며 공작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담당 부부장과 지도원들이 갑자기 초대소에 들어와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담당부서에서 회의를 소집한 이유조차 몰랐다가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담당 부부장이 조장인 김명걸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단점만 열거하고 나서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앞으로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담당부서 회의에서 자아비판
조장의 발언이 끝나자 담당 부부장은 나를 쳐다보면서 조원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소집된 회의에 참석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고 눈물까지 나왔다. 당장 조장 김명걸이 잘못한 것을 전부 나열하면서 반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 사이에서 생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든, 또 누구에 의해서 발생했든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가지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런 자리가 마련된 것 자체를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장 김명걸이 지적한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 앞으로 기회를 주면 고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조장 김명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그 누구에게 빚을 지고 그것을 갚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며, 그 누구의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춰 주려고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데 대해서는 어떤 비판을 해도 충분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 어떤 책임이라도 내가 질 것이 있으면 결코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진정성을 가지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다음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면서 보니 김명걸은 ‘당신들도 들은 것처럼 저 친구가 다 잘못했다고 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진심은 통한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담당 부부장이 회의를 결속하는 자리에서 김명걸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부부장은 “조장이 나이도 많고 또 조장이라는 책임을 맡았으면 그에 걸맞은 생각을 해야 한다. 공작조 내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조장이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조장은 책임지는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않고 조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오히려 나이 어린 조원은 자기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하니 이 공작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며 김명걸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리고 내게는 조원도 너무 본인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갈라지든가 아니면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 비판받게 하려던 김명걸의 의도는 빗나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 둘의 관계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그해 말까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김명걸은 적구화 교육 강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하지 못해 그들에게도 나쁜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담배를 걸고 고스톱을 치다가 승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당시 강사가 김명걸에게 피박을 씌워 담배를 많이 따게 되었는데, 이때 김명걸이 화를 못 참고 강사에게 주어야 할 담배를 그 자리에서 다 꺾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김명걸과 어떤 오락도 하지 않게 되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제 기억으로는 저와 동생이 어릴 때 다녔던 유치원은 유독 학부모가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나 상담 같은 프로그램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을 직접 참여해 저희와 함께 많은 체험을 해 주셨는데, 혹시나 학부모가 되어 참여한 그런 활동들에서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으셨나요? 완전히 다른 교육과 문화 풍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을 것 같아요.
아버지 : 너희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진행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어. 그래서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야.
나도 어렸을 때 북한에서 유치원에 다닌 적 있지만 북한에는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 기껏해야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님을 불러다 자식 교육 잘하라며 훈계하는 게 전부였지.
그러나 너희들이 다녔던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나도 그렇지만 다른 학부모들도 자식을 처음 낳아 키울 테니까 생소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또 자식의 일이라서 그런지 그런 어색함과 쑥스러움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어.
오히려 너희들이 유치원에 가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거웠고, 그래서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급적이면 참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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