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구화 실습과 테스트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적구화 교육을 마칠 즈음 우리는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적구화 교육환경관(일명 ‘남조선환경관’)에 가서 강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2주간에 걸쳐 실습과 함께 테스트 준비를 했다.
남조선환경관은 산 중턱에 너비 15m, 높이 10m, 길이 1.5~2km 정도 되는 터널을 뚫고 그 안에 음식점·슈퍼마켓·이발소·여관·개찰구·역대합실·커피숍·극장·문방구·양장점·내무반 등 남한의 각종 시설물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촬영 세트장 같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각 시설물에는 남한 출신의 강사가 들어가 있다. 이들은 실습하러 온 공작원들이 해당 시설을 이용하면서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고 현실감 있게 하는지 체크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해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남한 출신 가장해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한편, 대남 공작원들이 적구화 교육을 마치기 직전이나 마친 다음 꼭 한 번씩 해 보는 장난 비슷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양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이나 해외에 사는 남한 출신 교포처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다.
처음에 어떤 공작원이 시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에서는 돈을 가지고도 자기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사지 못하기 때문에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가 북한 내부의 기본적인 절차나 규정에서는 벗어나는 것이지만, 한국인화가 얼마나 되었는지 테스트도 하고 동시에 원하는 상품도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이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도 운전기사를 지도원으로 둔갑시켜 대동하고 평양 제1백화점에 들어가 얼마 전에 월북한 남한 사람처럼 서울말을 쓰면서 술과 담배를 산 적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적구화 완료까지의 8년 세월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친 후 그해 6월 하순에 대남 담당 부부장과 교육 담당 부부장, 그리고 해당 과의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 앞에서 그때까지 배운 서울말과 남한의 사회 환경, 각종 시설 이용 절차에 대한 종합적인 테스트를 받았다. 그런 다음 비교적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적구화 교육을 마쳤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후 담당 과장은 우리에게 “선생들은 이제야 공작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한 때로부터 꼬박 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공작조는 평양 순안 초대소 지역 내에 있는 북대천 1호 초대소로 옮겼다.
비밀 아닌 비밀… KAL기 폭파 등 각종 테러 사건
내가 적구화 교육을 마치던 1987년 후반기에는 한국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선거와 함께 88서울올림픽이 성공리에 개최되고 남북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많이 있었다.
특히 1987년 11월29일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한 후 북한에서는 신문·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공작원들의 경우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을 뿐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83년 9월에 있었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과 같은 해 10월에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등도 모두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공작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범은 대학 선배 이철
대구 미문화원 폭파를 거행한 테러범은 나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2년 선배 이철과 그의 조장이었다. 이철은 키가 작고 얼굴도 동안이어서 고등학생으로 위장하고 대구 미문화원에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한 후 원격조종 방식으로 건물을 폭파했다. 이철은 대구 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 후 여러 번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한편, KAL기 폭파 사건의 당사자인 김현희는 대외정보조사부(현재 정찰국 해외정보국) 소속이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연락부에서도 2개 공작조가 해상을 통한 직접 침투의 방법으로 서울에 침투한 후 테러를 감행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폭파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88서울올림픽을 파탄내기 위한 이러한 테러 공작은 준비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2의 KAL기 사건도 준비
당시 북한에선 제2의 KAL기 사건도 준비했다. 이 공작에는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이철이 속한 공작조와 윤동철·김군철 공작조의 2개 공작조가 동원되었다.
이 공작은 당시 하나밖에 없었던 국제공항인 김포국제공항이나 서울역 또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올림픽주경기장 등 시민이 많이 모이는 다중 집합 장소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불안감을 조성해 외국 선수들이 마음 놓고 올림픽 개최지인 서울에 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KAL기 폭파 사건 이후 김현희가 검거되고 안기부에 의해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국제사회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등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김정일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KAL기 폭파, 즉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준비했던 테러 행위를 중단한 것이다.
김정일 경호 전담 요원 선발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작전부에서는 김정일 전용 선박 운영과 경호를 전담할 경호원을 선발했다.
당시 작전부에서는 나와 동기인 19기 졸업생 가운데 키가 165~170cm인 친구들 가운데 40여 명을 1차로 선발해 대남 공작요원 전문 병원인 915 병원에 데려가 무좀까지 체크하는 등 별도의 정밀 신체검사를 했는데, 나도 거기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입학 때부터 연락부에서 공작원으로 선발해 위탁교육 중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본격적인 인선 과정 도중에 제외되었다.
그렇게 40여 명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정밀 신체검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19기 동기생 14명이 김정일을 경호하는 전담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1985년 5월 말 대학 졸업과 함께 중앙당 작전부 산하 원산연락소 예하에 있는 ‘충성호’ 방향에 배치되었다.
김정일 전용 선박 ‘충성호’ 방향
‘충성호’는 김정일이 동해상에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전용 선박의 명칭이다. 말 그대로 ‘김정일을 충성 다해 모시기 위해 만든 선박’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방향’이라는 것은 연락소 산하의 조직 명칭으로, 군대로 치면 대대나 중대 정도의 규모에 해당한다. 당시 충성호 방향에는 김정일 전용 선박과 호위 선박 등 3척의 ‘충성호’가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김정일의 요리사를 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충성호 선박과 함께 경호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 앞 부분에 1988년 5월에 원산에서 선박에 타고 있는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었던 허담의 옆모습이 보이는데, 그가 타고 있던 배가 바로 ‘충성호’이고 그 옆에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승조원 겸 경호원들이다.
김정일 낚시 위해 잠수 도중 사망한 동기생
그런데 내 동기생들이 충성호 방향에 배치된 지 3년이 지난 1988~89년에 그들 가운데 2명이 서로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충성호 방향 경호원으로 차출된 동기생 가운데 강호성과 유재석이 바로 그 비운의 인물들이다. 강호성은 잠수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유재석은 총기를 휴대하고 탈출해 군 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강호성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원래 대학 4학년 시절 1중대장이었던 나와 함께 3중대장을 했을 정도로 잠수와 수영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잠수복을 입고 공기통을 멘 상태에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임무는 김정일이 원산에 와서 충성호를 타고 낚시질할 때마다 물속으로 들어가 김정일 낚시에 물고기가 잘 물리도록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 임무 수행을 위해 미리 수중에 들어가 훈련하던 도중 어부들이 쳐 놓은 그물에 잠수장비가 얽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탈출하려다 경비대와 총격전 후 자살한 동기생
유재석은 남한의 인기 개그맨 유재석과 이름이 똑같아서 더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특공대반 2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비교적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휴대했던 AK 자동소총과 실탄 수십 발을 들고 뛰쳐나가 북한군 경비대 군인들과 대치하면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실탄을 난사해 여러 명을 사망하게 한 다음 끝내 자살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김정일이 원산에 오지 않는 기간에 훈련을 너무 혹독하게 시켜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남파 전 적구화 교육을 받을 당시 서울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아버지께선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리고 그 후 남한에 침투해서 실제 서울의 모습을 보셨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궁금합니다.
아버지 : 실제 서울의 거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서울 모형 사판’이라고 해. 실물 모양의 건물 등을 축소해 서울 지도에 붙여 놓은 것이지. 그것은 평양시 교외인 용성구역에 터널을 뚫고 만들어 놓은 ‘적구화환경관’이라는 곳에 있어.
적구화환경관은 평양시 교외의 산 중턱에 길이 1~1.5km, 높이 10m, 너비 15m 정도 크기의 터널 내부에 만들어 놨는데, 터널의 제일 안쪽 부분에 서울 모형 사판이 있거든. 말 그대로 서울 지도를 그려 놓고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그대로 축소해 만들어 놓은 거야. 예를 들면 광화문에서 세종대로를 바라볼 때 오른쪽에 정부 서울청사와 외교부 청사,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순으로 있는데 그 건물들을 그대로 축소 제작해서 엄청나게 큰 지도에 붙여 놓은 거라고 보면 돼.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정말 서울의 거리와 유사하게 잘 만들어 놨다는 데 놀랐고, 그것을 보면서 서울의 지리와 대표적인 건축물들의 위치·형태 등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서울 지리를 익혀 놔서 그런지 서울에 와서도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었어.
다만, 모형 사판이나 TV 화면에서 보던 것과 실물은 엄청나게 차이가 났지. 서울에 와서 백화점을 비롯해 건축물들을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섬세했어. 값비싼 건축 자재를 보면서 남한이 정말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했지.
그래서 북한에 복귀해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서울에 가 보고 절실히 느꼈다. 서울에 가 보니 거리와 건축물들을 엄청나게 잘 지어 놨던데, 통일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민족이 건설해 놓은 창조물들이 모두 파괴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파괴되면 그것들을 다시 복구하느라 또 수십 년이 걸릴 텐데, 그런 통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일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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