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연은 희숙의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태주를 처음 본 날, 태주에게 담배 한 개비 달라고 했던 이후로 처음이다. 도망갈 때가 올 거라고, 그때 도망가면 된다고, 지금은 아닐 거라 했던 태주 말이 기억났다. 도망갈 때가 언제야, 도대체! 지금 아니면 언제냐고.
증오 변태 새끼로부터 다섯 번째 전화벨이 울렸다. 희숙은 전화를 받을까 말까 여러 번 휴대폰에 손을 갖다 대었다. 승연도 덩달아 긴장했다. 희숙은 앞의 네 번이나 부재중이었던 걸 설명하려면 구차해지고 비굴해져야 하는 자신이 싫은 모양이었다. 희숙이 끝내 전화를 받지 않자 승연이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물었다. 희숙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변태 새끼니까. 희숙은 성이 변이라 이름이 아무리 예뻐도 이생에선 실패한 이름이라고 했다. 희숙과 승연이 또 한 번 깔깔대고 웃었다.
“이 새끼가 얼마나 변태 새끼냐면, 딸 이름을 변두리로 짓자는 거야. 난 이 새끼가 어떻게 서울대 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변두리가 뭐냐고 기겁하니까 또 변주리는 어떠냐는 거 있지. 주리란 이름이 예쁘잖아 하면서. 쌍노무 새끼, 애 이름 갖고 장난하는 새끼 처음 봤다니까. 남자애 낳았으면 성기라고 이름 지으려고 했대. 이 새끼한테는 진정성이란 게 전혀 없어. 이런 놈을 사랑인 줄 착각했던 내가 미친 년이지.”
희숙은 진미 오징어가 담긴 비닐을 입으로 죽 찢더니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꺼냈다. 오징어를 입에다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오징어를 잡았던 손가락을 입에 대고 빨았다. 술집 작부 같은 모습이었다. 희숙은 그런 자기 모습을 승연이 측은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는지 동작을 멈추고 냅킨에 손을 닦았다. 학습된 무기력에 방치된 인생이었다. 그녀가 깐깐하고 고상한 한 마리 학 같은 존재였다는 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자신의 가치를 잃고 이름도 잃은 존재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고.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그거 묻고 싶었지? 나는 결혼하려 하지 않았어. 내 과거, 내 치부 알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려 했겠어? 근데 내 과거, 내 치부 알고 있는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더라고. 그가 그러더라, 나 아니면 너를 누가 데리고 살겠냐고. 그렇지. 변태섭 아니면 누가 나와 살겠어. 변태섭이 나랑 결혼하자고 했을 때 난 정말이지 악마가 있다면 이 새끼겠구나, 했어. 어떻게 나하고 결혼하자는 소릴 할 수 있어. 근데 그가 그렇게 말하는데 나는, 도망갈 데가 없더라. 소름이 끼치더라고. 처음부터 변태섭 여자로 살 운명이었던 거야, 더럽게 살 운명. 이 집구석 사람들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아? 돈 좀 있다고, 지 아들 서울대 갔다고 유세가 대단해. 한동네 살아서 내 친정집 훤히 꿰고 있고.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젠 눈물이 말라서 나오질 않네. 예전엔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는데.”
희숙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말라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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