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후배 오승연을 만나고 왔다. 승연이는 그대로였다. 예쁘게 잘 살아온 줄 알았는데 상처 많은 삶이었다. 태주가 택을 받아 영등포로 간 사실을 말하지 말걸 후회했다. 태주와 승연이 그런 사이인 줄 꿈에도 몰랐다. 태주를 좋아한 여자가 많았는데 결국 승연이랑 그랬구나. 기순이 얘길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건 우리 내부에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의식화 세뇌 교육하면서 강요된 성 착취는 놀랍지 않다. 성 착취에 반발할 때마다 노동이나 정치 이슈가 희석화된다면서 조직보위론을 강조했다. 조직보위 좋아하네. 무상섹스 즐긴 거지 무슨 대의명분. 권지호가 생각났다. 프랑스 좋아하는 이유가 프리섹스 즐기고 싶어서라고. 난 그때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변태섭이 친구들과 하는 얘길 들었다.
프랑스 가서 더블 하고 싶다고. 프랑스는 기본이 더블이라고. 난 더블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근데 나중에 변태섭이 내게 더블 한 번만 해 보는 게 소원이라기에 어떻게 하는 거냐 물었더니 남자 둘과 하는 거라고. 쓰리섬이 아니라. 그래도 이해 못 하니까 비디오 던져 주면서 연구하라고. 더럽고 무식한 새끼, 민주주의 본가는 니미. 프랑스 가겠다고 한 이유가 그거 하고 싶어서였어. 내가 변태섭을 사람 새끼로 안 본 지 오래지만 자기 마누라한테 포르노 배우들이 하는 짓 시키는 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기가 막혔다.
오늘 처음으로 변태 새끼한테 맞은 숫자를 세어 봤다. 전화 5번이나 안 받았다고 50번쯤 때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하나도 아프단 생각을 안 했을까. 어차피 맞고 죽으나 그냥 죽으나 죽을 건데, 죽고 나면 아플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프다고 느껴지지 않더군. 전에는 때리고 나서 옷 벗기고 강간하더니 요즘은 어떤 년에 빠져서 내게 그 짓 안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긴 해. 친구 년이 남편한테 맞았다고 하니 믿지 않더만. 이 미친년 하는 말이, 서울대 출신이 어떻게 매질하냐고. 지랄도 풍년이라더니.
서울대가 별거야? 머리에 똥만 가득 찬 놈들이 부지기수인데. 서울대 나와 교수하면서, 서류 위조나 하고 자빠진 놈도 있고, 지 마누라 딴 놈한테 진상하는 놈도 있구만. 서울대 출신이면 윤리의식이 상타치냐? 같이 좋은 세상 만들자더니 저 혼자 좋은 세상 만들려고 날 끌어들인 거였어. 헤어질 결심을 하니 일기도 이젠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다.
권지호. 변태섭한테 맞으면서 권지호 생각이 났다. 권지호라면 내게 이런 대접은 안 했을 텐데. 권지호가 내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권지호를 그리워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일월산업에 지원하지 않았어도, 고금화란 가명만 쓰지 않았어도, 그날 표가 두 장이 아니라 한 장이었어도. 그래, 그날 표가 한 장이었으면 그럼, 그 여자랑 재회하지 않았을 테고. 내가 임신했다고 말했으면 나랑 결혼했을 텐데.
난 두 개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태섭을 사랑하면서 권지호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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