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무게도 없고 크기도 알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냥 느낌이더라. 감정을 정량화할 수 없잖아. 사랑이란 놈, 거부할수록 더 깊이 다가오던 걸. 변태섭을 만나고 온 날은 유난히 권지호가 생각났어. 나도 모르게 둘을 비교하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지 계산하고 있더라고. 권지호를 생각할수록 변태섭을 원망하고 변태섭을 생각할수록 권지호에게 의지하게 되더라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제 와서. 변태섭이 행복인 줄 알았어. 그런데 권지호를 만나서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어. 왜냐하면 사랑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거든.
근데 내 딸이 권지호 딸인 건 맞는 것 같다. 배란일에 만난 사람은 권지호뿐이니까. 변태섭 딸은 절대 아니거든. 유전자 검사가 불일치로 나왔어. 난 내 딸이 변태 새끼 딸이 아닌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 검사 결과 유전자 불일치였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데.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내 핏줄이 변태섭 네 새끼 아니어서 행복했다고! 살면서 내가 잘한 일도 있구나, 했지. 맞은 데가 욱신거린다. 너는 보는 눈이 있어 만만한 나를 골랐고 나는 보는 눈이 더럽게 없어 너 같은 또라이를 골랐어. 누굴 탓해, 병신 같은 년아.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 보러 갈게요. 아버지가 절 잘 키우셨다고 얘기할게요. 근데 엄마가 왜 아버지보다 빨리 왔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가 외국회사 취직해 돈 많이 벌려고 했는데 그 꿈 이루지 못해서 화가 나요. 아버지 죄송해요. 희재야 미안해 언니가. 혜미야 미안해 엄마가. 승연아 고맙다 선배가. 희숙의 마지막 일기는 횡설수설이었다.
아마도 술을 마시고 쓴 것 같았다. 승연은 희숙이 일기를 매일 쓴 게 아니고 듬성듬성 쓴 걸로 보아 고통의 시간을 기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숙의 일기장은 대학 1학년 때부터 기록한 것이었다. 일기장은 운동일지이자 연애일지이자 노동일지였다. 비교적 자세하게 자기 심경을 담았다. 특히 변태섭에 대한 사랑과 갈등, 증오의 감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느 날은 참회의 기도문을, 어느 날은 구원의 목마름을 써 내려갔다. 일기 사이사이, 희숙이 지은 자작시와 연필로 그린 그림이 있었다. 고향이 그리웠는지 영도 다리, 갈매기, 자갈치 시장 풍경 등을 그렸다.
일기장 맨 뒷장엔 진실, 헛된 죽음, 폭로, 승연, 거짓, 위선, 무식, 변태, 증오, 권지호, 아베마리아 등의 단어가 낙서처럼 무작위로 배열돼 있었다. 승연은 생각했다. 그녀의 통증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기만에 대해, 그리고 망가진 어떤 80년대 학번 여자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승연은 사람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승연은 베란다에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거실이 푸른빛으로 변할 때까지. 어둠이 완전히 승연의 모습을 감쌀 때까지. 밤은 길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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