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보다 일기장의 주인공인 윤희숙과의 조우는 예를 갖추고 싶었다. 나와 윤희숙이 만나는 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오승연의 고백은, 증언은 그만큼 엄중했다.
오승연은 내 집필실로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감정선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연기자가 캐릭터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 요소로부터 자신을 통제하는 것처럼. 집필실에 도착한 오승연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오승연은 따뜻한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입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오승연은 윤희숙이 죽기 전 만났던 내용으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오승연은 윤희숙의 일기장을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한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눈으로나마 따라가는 일이 그렇게 인내심을 요하는 일인지 몰랐다고 고백했다. 오승연은 가지고 온 보자기 꾸러미를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윤희숙의 일기장은 희숙의 아버지가 승연에게 보낼 때 보자기에 싼 그대로였다. 승연이 느린 동작으로 보자기 매듭을 풀었다. 일기장은 용수철 노트 스무 권이었다. 맨 앞장에는 숫자가 매겨져 있었고 보관을 잘해서 깨끗한 상태였다.
윤희숙의 아버지도 일기장을 들춰보진 않은 것 같았다. 딸이 밀봉된 편지와 함께 누군가에게 전달하라고 보내준 일기장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 손은 열 권의 일기장이 포개진 겉면을 맴돌았다. 묘하게 혹은 이상하게도 함부로 들출 수가 없었다. 윤희숙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일기장에 손을 대다 말다, 를 반복했다. 어쩌면 이 망설임은 윤희숙의 일기장을 들추기 전에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기장 앞에서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고 오승연과 눈빛을 주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일기장을 펼칠 수 있었다. 동갑내기 윤희숙이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반가워요. 희숙 씨. 윤희숙에게 한 첫인사였다.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화장한 말보다는 차라리 소박한 게 나을 듯싶었다. 오승연은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었다. 왜 하필 나였냐고. 오승연은 코트를 입다 말고 멈칫했다. 코트를 의자 등걸에 걸어놓고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희숙 선배가 제게 일기장을 보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건 김 작가께서도 눈치채셨을 거고요. 왜 김 작가인가 물으신다면 대답은 이것입니다. 저는 이 일기장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시민단체와 언론에 폭로할까, 진실과 화해위원회에 민원을 넣을까.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얼마 전 TV에서 방송 출연하신 작가님을 봤지요. 거기서 작가님은 제궤의혈(堤潰蟻穴)을 말씀하시며 어떤 글을 인용했어요. ‘우리가 그것들을 바꿀 수 없다고 방치하면, 그것들은 종종 우리를 바꾼다.’ 그래서 이 일기장이 가야 할 곳이 작가님이라고 생각했어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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