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바꿀 수 없다고 방치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더 큰 짐을 풀기 위해 지는 짐이라 생각해 주세요. 이제, 작가님이 이 일기장의 소유자입니다. 저는 작가님이 어떤 처분을 하든, 운명이라 생각할 거예요. 그것들에 의해 우리가 바뀌게 돼도 운명이겠지요. 기순이, 아버지, 태주, 희숙은 그냥 죽은 게 아니에요. 둑을 무너뜨리는 개미들이었지요.”
말을 마친 오승연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윤희숙의 운명이 내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승연으로부터 윤희숙의 일기장을 받아 든 후 나는 한동안 정체 모를 신열에 시달렸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가위에 눌린 날이 많았다. 악몽을 꾼 날엔 어김없이 어지럼증이나 두통이 생겼다. 무기력증이나 불면증이 나타나기도 했다. 꿈에서 수차례나 윤희숙을 만났다. 윤희숙을 꿈에서 만나고 나면 헛것이 자주 보였고 환청이 신문 찌라시처럼 따라다녔다. 마치 신내림 증상 같았다.
윤희숙의 영혼이 내 몸을 빌려 환생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울 정도였다. 나는 윤희숙에 빙의된 연기자처럼 혼잣말로 변태섭과 권지호에게 묻고 또 묻곤 했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글을 쓰는 내내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오승연에게 숙제 따위는 없어야 했고 네 사람과 죽음의 필연을 부정해야 했다. 오승연이 남은 삶에서조차 죽음의 빚에 시달린다면 가장 큰 희생자는 그녀가 될 테니까.
그보다 난 다른 명제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해 만약이란 가정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다큐멘터리에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었다. 가난이 문제였을까. 아름다운 외모가 장애였을까. 윤희숙이 변태섭을 안 만났다면 행복했을까. 또 권지호는. 사회주의 세상이 됐다면 행복했을까. 윤희숙 인생에 전두환이 없었다면 행복했을까. 그들의 삶에 혁명과 민주란 명분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아서 행복했을까. 어느 부분에서든 멈췄더라면 그녀가 행복했을까.
탈고 후 오승연에게 연락했다. 3개월 만이었다. 야윈 내 얼굴을 보자 오승연은 놀라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빤한 요식행위 같은 건 생략했다. 오승연이 먼저 입을 뗐다. 힘드셨나 봅니다. 짐이 될 거라 생각은 했는데. 나는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따르며 말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있나요. 인생이 짐인 게지요. 윤희숙 씨가 저를 좋아했나 봐요. 꿈에 자주 나타났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죠. 덕분에 불면증으로 고생 좀 했고요. 이상해요. 윤희숙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데 꿈속에선 너무 선명한 거 있죠. 정말 올리비아 핫세와 닮았어요. 주술 효과인가 봐요. 오승연 씨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았다고 하니 올리비아 핫세 닮은 윤희숙 씨가 가녀린 몸으로 나타났어요. 매번 같은 얼굴이었어요.”
오승연은 내가 윤희숙 이야기를 꺼내자 귀를 쫑긋했다. 집중하는 모습이 호기심에 가득한 소녀 같았다. “희숙 선배가 뭐라던가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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