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울 향, 항구 항’(香港)의 광동어(캔토니즈) 발음이 로마자 표기를 거쳐 굳어진 우리말 표기가 ‘홍콩’이다. 홍콩말로는 ‘헝꽁’처럼 들리며 표준어(푸퉁화·만다린)에선 ‘샹깡’이라고 한다. 캔토니즈란 광동(Canton·廣東)의 현지 발음 ‘꿩뚱’이 영어화(캔턴)한 뒤 형용사형 어미가 붙어 생긴 단어다. 캔턴·캔토니즈, 차이나·차이니즈 다 마찬가지다. 8000만 명~(전 세계) 1억 명을 헤아리는 광동어권의 핵심이 홍콩이다.
광동어엔 종성 즉 받침(p·t·k)이 살아 있어 한국어 한자발음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더 고대 발음이라는 뜻이다. 푸퉁화~광둥화의 차이란 영어~불어 정도의 거리로 상상하면 된다. 통역 없이 소통 불가능하다. 근대국가 통합성의 기초가 표준어 확산이며 이는 공교육과 미디어 발달에 비례한다. 1912년 4억여 명 인구를 껴안고 출발한 신생 중화민국은 20년도 안 돼 중일전쟁까지 겪으면서, 표준어(국어) 교육에 힘쓸 여력이 없었다. 현지 최신 공식 통계(2021)에 따르면 본토 인구의 80.72%가 푸퉁화를 구사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한 지 70년 넘게 걸려 도달한 수치다.
홍콩 역시 반환 30년이 돼 가는 현재, 일상과 업무에 푸퉁화가 널리 통하게 됐다. 언어정책이란 결국 국가 정체성 구성·재편의 도구다. 중화민국 수립 직후 표준어 결정을 위한 투표에서 ‘광동어가 1표 차로 졌다’고 전해진다. 확인 불가능한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문명의 중심지였던 광동 지역 자긍심이 엿보인다. 1913년 중화민국 국어통일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언어표준화 논의를 벌였으며, 수도권 중심으로 정하는 세계적 관례에 따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인도의 사례와 대조적이다. 인도에선 거센 반발로 힌디어 등 22개 언어에 헌법상 공용어 지위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조차 경상도 출신 과거급제자가 평안도나 함경도에 부임하면 이방(吏房) 등 중간관리자의 통역이 필요했다. 중국 대륙에선 오죽했겠나. 그럼에도 ‘하나의 언어’로 엮여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하나의 중국’ 담론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표의문자(한자)에 기반한 언어 통합성이다. 24개 공용어를 가진 유럽연합(EU)에선 통·번역비만 연간 약 10억 유로(1조5000억 원)가 든다는데 말이다.
광둥성 신안현 동남쪽의 작은 어촌 포구였던 홍콩이 아편전쟁 결과 영국 지배 하에 들어갔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본섬이,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구룡반도가, 1898년 신계와 200여 개 섬이 99년간 조차되며 오늘날의 영토가 확정됐다. 홍콩은 20세기 중반 본토 혼란과 공산주의를 피해 몰려든 난민으로 값싼 노동력과 자유무역항 조건 속에 경공업·무역 기지가 됐으며 차차 금융 허브로 비약했다.
1984년 중·영 공동성명으로 1997년 반환과 ‘일국양제’라는 인류사적 실험이 시작됐다. 반환 이후 10여 년간 안정이 유지되는 듯 했으나 긴장이 쌓여 갔다. 시진핑 시대 이래 ‘애국’을 내세운 중앙집권적 압박의 강화가 정당화되면서다. 2014년 8월 중공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홍콩 행정수반 선거 개혁안을 발표했다. 직접선거를 허용하되 후보자 명단을 중국공산당 측이 사전에 거르는 구조였다.
일국양제로 약속된 자치권의 침식 위험을 직감한 홍콩 사람들이 움직였다. 학생·시민단체가 도시 공간을 점거하면서 저항한다. 2014년 9월 학생단체 위주의 대규모 시위에 일반 시민이 가세했다. 약 80일간 이어진 점거 과정에서 경찰의 최루가스·페퍼스프레이에 우산이 방패로 쓰여 이른바 ‘우산혁명’이다. 이는 홍콩 민주화운동의 중요 전환점이었고 범인송환법과 국가보안법 반대로 이어지는 흐름의 기점이 됐다.
2019년 송환법은 정치적 탄압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공포를 불렀다.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송환법은 철회됐으나 진정한 의미의 직선제 실현엔 이르지 못했다. 2020년 홍콩국가보안법 제정으로 추상적 죄목이 신설돼 민주인사들 대거 구속, 독립언론 폐간, 야당·시민단체 해산이 뒤따랐다.
‘애국자가 다스리는 홍콩’ 구호 아래 개편된 선거제도로 친중 일색의 입법회(의회)가 됐다. 교과서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기술은 사라지고 중국공산당 중심의 역사 교육이 우선시된다.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자, 이게 자유시민으로 살던 홍콩인들의 현재 속내다. 본토 출신 중국인들이 늘면 조만간 인구 구성 자체가 변해 홍콩은 그저 중국의 일부로 존재할 뿐이다.
홍콩영화로 상징되던 문화적 매력 또한 옛말이다. 영국령 시절 표현의 자유 속에 홍콩은 영화 제작의 국제적 허브가 되었고 세계적 스타들(이소룡·성룡·주윤발·장만옥 등)을 배출했었다. 독자적 대중문화 콘텐츠를 가지기 이전의 한국인들에게도 큰 위안이자 동경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경제가 급성장하며 중심지가 베이징·상하이로 이동한 이래 더 이상 세계시장을 흔들 홍콩 영화 소식을 못 듣게 됐다. 문화산업의 침묵이 도시 정체성의 퇴색과 맞닿아 있다.
홍콩은 여전히 안정된 경제도시로 기능하면서도 글로벌 경쟁력 약화와 정체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 정부가 주권 회복과 발전을 강조하지만 서방 세계의 눈엔 자유의 후퇴와 ‘일국양제’의 종말이 들어온다. 동서양의 공존·융합, 서로 밀어내면서도 붙들어 매기도 하는 홍콩 특유의 향기… 이제 영영 되살리지 못할 역사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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