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의 문제작 ‘사람의 아들’을 다시 읽었다. 옛날 ‘오늘의 작가 총서’를 읽던 시절 ‘사람의 아들’은 소설의 우상 같은 작품이었다.
‘사람의 아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민요섭이라는 신학도가 기도원 근처에서 살해된다. 남 경사는 단서를 찾아 민요섭이 다닌 신학교를 찾아간다. 민요섭은 일본의 실천신학자, 뱀을 숭상하는 이단(오피테돌)들에 빠지면서 딴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안다. 남 경사의 추적은 항도 B시의 여인숙을 찾아가고, 거기서 민요섭의 추종자가 된 조동팔의 존재를 발견한다. 민요섭과 조동팔, 두 사람은 새로운 신을 찾는 삶을 살아간 것이었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이다. 살해당한 민요섭이 쓰고 있던 이야기가 소설 속 소설의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사람의 아들’이 주인공이다. 칼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는 예수가 성령이고 ‘말씀’이면서 ‘사람의 아들’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로 오셔서 필멸의 운명을 지닌 인간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사람들을 천상의 세계로 이끈다. 민요섭의 소설 속에서는 이 예수의 인간적 측면이 아하스 페르츠라는 또 다른 존재에 전적으로 부과된다. 그는 예수가 출생한 날 같이 출생했으니 일종의 쌍생아로서, 예수의 ‘신적인 초극’과 상반된 길을 걷도록 운명지어진다.
아하스 페르츠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 오로지 천상의 ‘영원’에 의해서만 구원이 약속될 수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항변한다. 삶의 지상적인, 인간적인 구원을 꿈꾼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천상의 약속에 기대어 고통을 참아내게 할 뿐이라 생각한다. 끝내, 유다로 하여금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넘기도록 강요하기까지 한다.
이 이야기를 쓴 민요섭은 회심하여 자신이 창설하려던 새로운 종교를 버리고 하나님의 품속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민요섭의 길을 따라 범죄까지 저지르며 희생을 감내하던 조동팔은 그런 민요섭을 살해하고 자기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사람의 아들’은 문제작이지만, 그후 여러 번 고쳐 쓴 것은 작중의 논리구조가 어딘지 모르게 다소 엉성하게 느껴지는 탓도 클 것이다. ‘정통’에 들지 못한 영지주의(그노시즘)의 여러 분파들과 기타 학설을 종합해 놓은 까닭에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정연하게 개진되어 있지 못한 점도 없지 않다. 그만큼 이 작품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한 ‘초상’이다.
특히 그는 민요섭의 소설을 통해, 오랫동안 유럽에서 전승되어 온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 이야기를 ‘다시 쓰는(패러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은 배교, 배신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가며 잠깐의 휴식을 간구하는 예수를 냉정하게 대한 ‘아하스베루스’는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죽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죽지 않는 것, 떠돈다는 것, 이것은 크나큰 형벌인가 한다.
지난 일 년 사이, 배신이라는 것이 이토록 절절한 화두가 되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걸까? 계엄의 밤 이후, 온갖 인간 군상들이 벌여온 패거리 행악들, 거짓말들, 거짓 증언들, 가식, 눈치 보기, 동조, 줄타기, 순응, 출세욕, 그리고 배교와 배신, 유다가 된 자들, 아하스 페르츠의 운명에 처해질 자들을 생각한다. 인간이란 참으로 가엾은 존재인가 한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여 가라. 오라, ‘사람의 아들’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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