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에 나는 작고 소박하고 가벼운 책 한 권을 손에 들었다. 삼중당 출판사의 문고판 ‘모파상 단편집’을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이 책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고 나 또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국민학교 독서실에서 어둑해질 무렵까지 ‘타잔’을 읽으며 아프리카를 그리던 철부지는 이 책의 누런 표지 첫 장을 펼치면서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첫 작품은 ‘비겟덩어리’였다. 욕망과 위선이 엉킨 이 작품은 13살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런 사람들, 이런 세상도 존재하는구나! 단편집 안에는 가짜 진주목걸이 때문에 한 여성이 인생을 바친 ‘목걸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삼중당 문고의 가격이 한 권에 200원 정도로 부담이 없어 서점에 가서 한 권 또 한 권 사서 보았다.
대학원 갈 무렵에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이 작은 책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사과상자 3개를 차지했다. 고등학생 때는 헤르만 헤세와 이광수의 소설은 물론이고 시이튼의 동물기, 파브르의 곤충기까지 두루두루 읽었다. 이 허름하고 가벼운 책들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보았고 만졌다. 요즈음 삼중당 문고는 판형이나 종이, 두께나 표지 등이 모두 현대화되고 고급화되어 과거의 정다움은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지금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막 소녀가 된 딸에게 줄 선물로 작고 소박한 세상을 안겨준 아버지가 참으로 고맙다. 묵묵히 내 손에 쥐어준 그 책 한 권은 나의 세상이 되었고 내가 표현할 세상이 되었다. 어릴 때는 사소한 선물도 어찌 그리 좋았는지 모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외삼촌이 주었던 남색 가죽장갑, 유치원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건넸던 노란 필통은 지금도 눈앞에 아련하다. 이제 더 이상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고 싶다. 아잇적 나에게 부탁하여 그가 받은 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하거나 미래의 자신을 윽박질러 그가 감추고 있을 성취와 행복을 빌려 오고 싶다.
이번 성탄절, 어느 아파트 노부부가 아주 커다란 바구니에 간식을 가득 담아 공용 공간에 편지와 함께 두었다는 소셜미디어 기사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1504호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다. 이웃의 예쁜 어린이 아가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작은 선물을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이분들의 선물은 어린이들에게 평생의 만나가 되었으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시기는 선물을 주고받기 좋은 때이다. 연말연시 최고의 선물로 도도하고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통에 담아 주면 어떨까? 요맘때 우리는 시간을 간절히 정지시키곤 하니까. 그게 어쩐지 어색하면 자신을 선물로 주면 어떨까? 자신의 관심, 자신의 기억, 누군가가 요청한 조언과 도움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자연이 내게 마련해 준 시간과 공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지니고 호흡하며 보고 듣고 맛본 모든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한 해 동안 세상이 묵묵하게 내게 건넨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앙상한 가지에서 인사하던 연분홍 꽃잎, 얼굴 붉히며 스스럼없이 떨어진 단풍잎 한 장, 나무 위에 꽁꽁 언 채로 매달려 누군가를 기다리는 감 한 개. 그들은 내게 선물이었고 나 또한 누군가의 선물이었으리라고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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