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자산은 때로 기업의 미래를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된다.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까지 대한민국 주식시장에서 가장 뜨거웠던 종목을 꼽으라면 단연 ‘천일고속’이다. 본업인 고속버스 운송업의 부진으로 수년째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이 노포(老鋪) 기업을 단숨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시킨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50년 넘게 지켜온 ‘땅’이었다.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고속버스터미널(강남터미널) 60층 복합개발 계획은 천일고속의 수장 박도현 사장을 단순한 운송업자에서 강남 도심 재편의 핵심 설계자로 격상시켰다.
부산에서 시작된 77년의 저력, ‘재벌’이었던 노포의 위상
천일고속의 뿌리는 1949년 부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故) 박남수 창업주가 부산에서 ‘천일여객자동차’로 출발한 이 회사는 한때 조양상선, 제일생명, 진주햄 등을 거느렸던 ‘천일그룹’의 모태였다.
특히 1970년대, 대한민국이 ‘수출 보국’의 기치 아래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근대화의 기틀을 닦던 시절, 천일고속은 그야말로 국가 발전의 심장과 현장을 잇는 대동맥이었다. 당시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단순한 길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천일고속은 그 길 위에서 구미·울산·창원 등 신흥 공업지대로 전국의 인적·물적 자원을 실어 나르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박 창업주는 ‘천일’ 즉 ‘천하 제일의 서비스’라는 사명에 걸맞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최신식 장비를 도입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국내 최초로 우등형 버스 시스템의 전초가 되는 고속운송 면허를 취득하며 ‘고속버스 명가’로 군림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소명에 응답한 결과였다. 비록 현재는 중소기업으로 분류되지만, 선대가 구축한 서울고속버스터미널 2대 주주라는 지위는 국가 인프라 구축의 중심에 서 있던 천일의 위상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자 박 사장이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경영권의 기반이 됐다.
박 사장은 2011년 부친인 박재명 대표와 공동대표이사를 역임한 후 2014년 36세의 나이에 대표이사를 맡았고, 이듬해인 2015년에는 천일고속의 최대주주가 되면서 3세 경영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본업의 몰락과 자산의 역습… 4년 연속 영업적자에도 주가는 ‘9연상’
현재 천일고속이 처한 경영 현실은 냉혹하다. 한때 대한민국을 누비던 천일고속 버스의 위용은 KTX와 SRT 등 고속철도의 확장, 그리고 저비용항공사(LCC)의 공세에 밀려 빛이 바랬다. 재무제표에 나타난 숫자는 처참한 수준이다. 2022년 영업손실 74억 원을 시작으로 2023년 51억 원, 2024년에는 53억 원 등 사실상 본업에서는 적자 지속의 상태다. 2025년 3분기 누적 순손실은 51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3억 원 늘었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메커니즘은 실적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2025년 11월 서울시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발 계획이 발표되자, 천일고속에 투자자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지분 구조는 신세계센트럴시티(70.49%)에 이어 천일고속(16.67%)이 2대 주주다. 서울시의 개발 계획 발표에 천일고속의 주가는 ‘9거래일 연속 상한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썼다. 3만6000원 대에 머물던 주가는 약 보름 만에 51만8000원으로 치솟기도 했다.
본업은 망가졌지만 보유한 자산의 가치가 시가총액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자산주’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투자자들은 천일고속의 버스가 아닌, 그 버스가 서 있는 ‘강남의 땅’에 열광했다. 박 사장은 영업 실적의 부진을 50년 넘게 선대가 지켜온 ‘지주(地主)의 힘’으로 돌파하며 기업 가치를 재정립했다.
반포 대장주 ‘래미안퍼스티지’ 10년의 안목과 주변 시세의 격변
박 사장이 거주하는 곳은 대한민국 부의 상징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다. 그는 2014년 이 아파트의 대형 평수인 222.76㎡(81평형)를 29억 원에 매입했다. 당시 부동산 시장은 침체기였으나 박 사장의 안목은 정확했다. 2018년부터 매매가가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2025년 9월 해당 평형의 시세는 89억 원을 기록했다. 11년 만에 60억 원의 시세 차익을 실현한 셈이다.
박 사장의 주거지는 그가 경영하는 천일고속의 심장부인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자신의 주거 가치와 가업의 자산 가치를 동일한 선상에 놓은 리더의 공간 경영으로 풀이된다. 2014년 매입 당시 주변 아파트 평당가는 3000만~4000만 원 선이었으나, 현재 반포동 일대는 평당 1억5000만 원을 돌파하며 ‘국민 평형 50억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주변 시세의 폭발적 상승은 터미널 부지의 잠재적 가치를 끌어올리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고, 박 사장은 그 수혜를 개인 자산과 기업 자산 양쪽에서 동시에 누리고 있다.
60층 ‘컴팩트시티’ 조감도에 담긴 강남의 미래 스카이라인
서울시가 공개한 개발 계획 조감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50년이 넘은 낡은 터미널 건물을 허물고 최고 60층 이상 주상복합 빌딩 6개 동이 들어서는 이른바 ‘강남 콤팩트시티(Compact City)’ 구상이다. 핵심은 지상과 지하의 완벽한 분리다. 현재 지상에 노출된 고속버스 승하차장과 주차장은 모두 지하로 통합·현대화된다. 대신 지상부에는 업무·판매·숙박·문화 그리고 하이엔드 주거시설이 결합된 입체 복합 단지가 조성된다.
특히 일본 도쿄 시부야의 ‘어번 코어’ 개념을 도입해 지하철 3·7·9호선과 고속버스를 수직으로 연결하는 입체 환승 시스템을 구축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강으로 이어지는 ‘입체 보행교’다. 반포터미널에서 한강 시민공원까지 단절 없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보행 환경이 조성되면 반포의 가치는 단순 주거지를 넘어 세계적 관광 거점으로 거듭나게 된다. 박 사장이 지배하는 천일고속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지분 16.67%를 보유한 실질적 주인으로서, 향후 개발 이익 환수뿐만 아니라 신설될 상업 시설의 운영권 확보 등 무궁무진한 사업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폭탄 배당’ 논란과 증여세 숙제, 그리고 리더의 새로운 시험대
박 사장의 커리어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는 단연 ‘고배당’ 전략이다. 2013년 단독 대표 부임 이후, 천일고속은 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주당 수천 원의 파격적인 배당을 이어왔다. 특히 2015년 창업주 고(故) 박남수 명예회장이 38년간 명의신탁했던 차명 주식을 실명 전환해 박 사장 형제에게 증여한 직후부터 배당 성향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당시 박 사장과 박주현 부사장이 부담해야 할 증여세는 약 400억 원대에 달했는데, 본업의 실적 부진 속에서도 강행된 배당은 오너 일가의 세금 납부용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너 일가의 지분이 85.7%에 달하는 지배구조상, 거액의 배당금은 고스란히 오너가의 세금 납부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시장에서는 ‘사금고화’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역설적으로 터미널 개발 호재가 터지자 주주들은 이 배당 체력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박 사장은 단순히 배당금으로 세금을 내는 단계를 넘어, 2031년 완공 예정인 ‘마천루 터미널’의 실질적 경영자라는 시험대에 섰다. 래미안퍼스티지에서 내려다보던 낡은 땅이 60층 높이의 미래 도시로 솟아오르는 과정에서, 그는 소액주주와의 신뢰를 회복하고 노포 기업 천일고속을 진정한 ‘모빌리티&자산 경영’ 그룹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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