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라는 이름은 눈부시다. 해방 후 김기림이 ‘이상선집(백양당, 1949)’을 펴냈고, 시인 박인환이 6ㆍ25 중에도 이상 추도식을 거행했고, 비평가 이어령은 이상을 알레고리로 읽는 평문('순수의식의 뇌옥과 그 파벽', 1954)을 써내고 잡지 "문학사상" 창간호의 표지를 구본웅의 이상 초상화로 장식했다(1972.10). 그로부터 이상은 동시대적인, 가장 현대적인 문학의 상징어가 되었다.
어디, 올해의 수상작은 어떤 작품인가?
세 친구, 수진, 재한, 유미가 있었다. 평범한 아이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어떤 평범한 아이도 각각의 특성은 갖게 마련이다. 셋 가운데 수진이 담도암에 걸렸고, 투병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언에 따라 두 사람은 뼛가루를 일본 나가노의 도가쿠시 숲에 뿌리기로 한다. 이야기는 여행 루트를 따라 숲에 이르고 두 사람은 '과제'를 '해결한다.'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중에 둘은 '코요'라는 이름의 '오카마'를 만난다. 눈 속에서 코요는 두 사람에게 하룻밤을 재워준다.
'히쓰 마부시'는 나고야식 특이한 장어덮밥이라는데, 간간이 등장한다. 그럼 소설 제목 '눈과 돌멩이'는 어디에 나오나? 이 제목은 교토 료안지(龍安寺)에 있는 열다섯 개 '돌의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기억이 맞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정원에 서본 적이 있다. 어느 자리에서도 열다섯 개 돌을 다 볼 수 없다는 정원이다. 교토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지만 그때 눈이 왔던 것도 같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열린책 출판사 선집에 '돌의 정원'이 있었던 기억도 난다.
작중에서 수진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수진이 어려서 뜻하지 않게 자기집 현관의 유리창을 깨뜨렸던 기억에 연결된다. 코요의 집에서 재한은 눈덮힌 정원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든다. 재한은 생각한다. "단 한번의 결단으로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다. 끝낼 수 있다. 수진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재한은 돌을 주머니에 넣고 숲의 세계를 빠져나온다. 유미에게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 소설 마지막 문장 둘, "재한은 주머니 속 돌멩이를 꼭 쥐었다. 그것은 단단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
삶은 죽음 위에 떠 있는 신기루와 같다. 알베르 카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지속해 가며 무어라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가리켜 '부조리'하다고 했다. ‘시지프 신화’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부조리는 인간의 부르짖음과 세계의 비이성적 침묵 사이에서 태어난다.”
한국문학이 '생의 근본 문제'를 사유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1956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걸쳐 그 소설적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이 '근본 문제'가 최근 젊은 세대의 '일본관광' 붐을 타고 '재귀'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이런 태도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수상작의 배경 나고야의 도가쿠시는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그네들의 신성 공간이다. 재한과 유미는 그곳 숲에 수진을 뿌렸다. 어디 뿌린들 어떠랴. 삶은 죽음 앞에 서있을 뿐이다! 뒷맛이 씁쓸하다. 한국소설 '세계화'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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