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영화평론
가을의 숲을 본 적 있는가? 짙은 녹음과 피처럼 붉은 단풍잎들이 부드럽게 섞인 가을 숲은 영고성쇠의 섭리가 채색된 진경을 열어 보이는 것만 같다. 이 섭리는 권불십년이 전하는 취지에도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부침생멸의 흐름 속에서 최상위에 도달함은 곧 하강 단계로 진입하게 됨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달구어지는 여름과 동장군의 시퍼런 채찍이 만물을 얼리는 겨울의 중간기로서의 가을은 풍요와 사멸을 모두 담고 있다. 요한 하위징아가 기독교 유일신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적이던 유럽의 14~15세기를 ‘중세의 가을’이라 표현한 이유도 풍성한 수확과 어두운 쇠락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가을의 비극적 특수성에 놓이리라.
단풍잎들 사이로 선명히 새어 나오는 가을 햇빛처럼 한 영화가 전 세계에 가한 충격이 퍽 따갑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이 이란 정부의 압박 속에서도 목숨 걸고 찍어 세상에 내놓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하 ‘나무’)’이 바로 그 영화다. 이 영화는 히잡 착용 반대 시위 운동을 잔혹하게 과잉 제압한 이란 신권정치의 폭력적 행태를 선명히 폭로했다. 영화(인)의 실천적 용기가 정의의 빛을 발한 사례로 특기될 만하다.
그러나 영화가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해 갖는 의도와 그 현실적 효과에 더해, 그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작품성도 톺아보는 작업을 게을리할 수 없다. ‘나무’의 진중한 전개를 감상하고 있으면, 그 안에 두 상이한 결이 기이하게 공존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극 영화이면서도 테헤란의 실제 시위 현장이 기록된 영상들을 중간중간 삽입한다. 작품 초중반에서는 사회 비판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 가족의 분열과 파국을 스릴 넘치게 보여준다.
언뜻 보면 상충하는 듯한 두 맥락의 이 기묘한 공존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사실, 이 이중적 공존에 주목할 때, ‘나무’의 뿌리를 간파하는 요령을 얻을 수 있다. ‘나무’는, 허구적 플롯에 사실적 참상을 자연스레 접목하는 연출을 구사함으로써, 권력이 보호의 명목을 내세워 사회를 옥죄는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로 분석되면, 그 수형도가 명료히 그려진다.
기이한 이중성은 영화의 오프닝 쇼트에서부터 미묘히 자라난다. 오프닝 쇼트의 자막은 인도 보리수가 숙주 나무에 기생해 그것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신성한 나무로서 존립한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의아하다. 어떻게 살해가 성스러운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임제 선사의 어록이 좋은 참고가 될 듯싶다. 그는 부모를 만나거든 부모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라고 설파했다. 영양분을 제공해 생명의 기반이 되는 숙주는 권력관계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바, 그런 권력자를 넘어서는 상징적 살해를 통해서만 온전한 주인이자 성자로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나무’에서 사회적으로는 신권정치의 형태로, 가정적으로는 가부장제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이 집밖에서 히잡을 착용해야 하는 사회적 관습은 가부장제국가의 여성 억압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란 정부가 군인을 투입해 무력으로 시위의 주도자와 참여자를 제압하는 것은 텔레비전 뉴스 방송에서 폭도가 일으킨 분란에 대한 정당한 통제로 보도된다. 가족은 작은 사회다. 부모인 이맘과 나즈메가 자식인 레즈반과 사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고 그 간섭을 통제가 아닌 사랑과 보살핌이라 표현하는 대목은 시민의 절대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국가의 독재적 태도와 직통한다.
그 독재의 잔인한 민낯은 히잡 착용 저항 시위를 배경 상황으로 설정한 영화의 중간중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즈메·레즈반·사나가 극의 내용이 전개되는 흐름 속에서 뉴스 보도 내용과는 다른 진실의 온상을 스마트폰으로 목격하는 장면들이 문제적인 이유는 무장 군인 및 경찰의 물리적 폭력을 날것 그대로 공개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이 스마트폰 화면 비율 영상이 군데군데 삽입된 연출이 중요한 까닭은 픽션으로서의 흐름에 일순간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그 흐름과 충돌하면서도 절묘히 어우러지는 이음새에 있다. 유혈이 낭자하고 총격이 발생하는 실제 현장이 기록된 영상들은 극 영화로서의 허구성을 일순간 깨트리는 부분이 있으나, 그 부분이 작품의 일관성과 완성도를 저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의 안팎을 유연히 이어주고 있다.
‘나무’는 사회의 분열과 참상이 한 가족의 평화를 산산이 일그러뜨리는 모습도 무시무시하게 그려낸다. 그 가족의 가부장인 이만이 아랍어로 믿음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다는 점은 가정의 불화가 파멸로 향해 가는 비극을 한층 안타깝게 만든다. 이만은 자기 총을 훔친 가족이 누구인지 색출하려는 불신에 휩싸일 뿐만 아니라, 법을 잘 앎에도 아내와 딸을 감금하는 불법적 광기마저 표출하고 만다. 그 강압은 신의 진리로서의 종교적 율법과 사회적 국법을 지나치게 맹신한 독단의 결과 아닐까?
‘나무’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출혈을 일으키거나 신체를 구속하는 수준의 통제는 보살핌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폭력임을 냉정히 깨닫게 된다. 수많은 희생자로부터 흐르는 피가 자꾸만 단풍잎처럼 보이는 것은 그 처연한 고통이 독재자의 몰락을 예고하기 때문이리라. 신성한 권력이 가을의 상태에 처할 수 있음을 예민하게 자각하는 태도로부터 만물의 각양각색 아름다움이 꽃피는 봄은 도래할 터이다. 그 봄날의 중심에 뿌리내린 영화적 세계수가 ‘나무’임은 물론이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줄거리
수사 판사 승진을 앞둔 이만은 처 나즈메와 딸 레즈반·사나를 둔 가장이다. 그는 히잡 착용 반대 시위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총을 받게 된다. 그의 안방 서랍에 보관됐던 총이 사라지면서 가족 간의 의심과 불화가 발생한다. 그의 집 주소와 연락처가 인터넷에 공개되기까지 한다. 이만 가족은 위험을 피해 타 지역으로 도피하던 중, 총을 숨긴 이가 사나임이 밝혀진다. 사나는 이만에게서 달아나고, 이만은 나즈메와 레즈반을 감금한다. 사나 덕에 풀려난 나즈메와 레즈반은 이만과의 추격전을 벌인다. 사나는 이만이 선 건물 바닥에 총을 쏘아 그를 추락사시킨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 소개
이란 정부로부터 반국가 혐의에 얽혀 징역형을 언도받은 모함마드 라술로프가 유럽으로 망명해 발표한 영화가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