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3일은 고종의 국장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고종황제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백성의 반일 감정은 들끓고 있었다. 장례 이틀 전인 3월1일에 대한의 모든 백성이 떨쳐 일어나 봉기했다. 당시 서울에는 방방곡곡에서 유림들이 흰 갓을 쓰고 모여들었다. 온 백성이 울부짖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와 고종 황제의 승하를 조상하는 울음소리로 장안은 떠나가는 듯했다. 거리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는 학생들을 일본 헌병이 폭행하고 잡아갔지만 만세운동은 더욱 번져 나갔다. 3·1운동은 일본 궁중까지 알려져 큰 긴장 상태였다고 한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 세계평화가 기초로 삼아야 할 항목들을 천명하는 ‘14개항’을 제출했다. 이 중 제5항은 아시아식민지에도 타당한 내용이었다. 일본당국은 긴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영친왕과 민갑완의 기존 정혼관계를 파혼시키고 일본 황족 마사코와 약혼시켰다.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조선 총독은 조선인민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영친왕과 마사코의 정식혼인을 결정하고, 1918년 8월 고종의 탄신일에도 영친왕의 환국을 허용했다. 10년이었다.
이는 윌슨의 의중과 세계 여론을 의식한 일제가 두 왕실이 민족자결주의가 필요 없을 정도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1919년 1월25일을 결혼일로 정하고 한일 왕가의 돈독한 관계를 국제적으로 선전하려는 정략으로 신혼여행지를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가 열리는 파리로 잡고 국혼식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영친왕 정략결혼에 반발하던 고종은 두 가지 대항조치를 추진한다. 하나는 이화학당 교수 하란사와 함께 의친왕을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로 보내 윌슨 대통령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1918년 말 양국 대표에 의해 서명된 한미수호조약 원문을 의친왕 편에 보내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상기시키며 한일합방 방관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지적하고, 지금이라도 미국 정부가 한국 광복에 힘써 줄 것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다른 하나는 고종 자신이 이회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경으로 망명을 감행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란사는 파리로 가기 위해 북경에 들렀을 때 급사했다. 따라서 파리 밀사계획은 어그러졌다. 북경 망명정부 수립 계획은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으나 급작스러운 고종의 승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의 파리 밀사 파견 계획을 알아차렸고 서둘러 고종을 독살했다. 고종은 식혜에 들어간 청산가리로 독시되었다. 일제는 이 일을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도성안, 조선땅,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도 고종의 독살 이야기가 생생히 적혀있다.
고종은 북경에 망명정부를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한 3.1만세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의 모태인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를 달구었던 피맺힌 ‘대한독립만세’의 심정을 후손인 우리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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