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마음이 울리었다. 명징한 소리가 오래 남았다. 이란희 감독의 영화 ‘3학년 2학기’는 고등학교를 떠나 대학 또는 사회로 나아갈 고3 사회 초년생들의 설레고도 가슴 아린 이야기를 담담하게 다룬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성장 노동 영화’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할뿐더러, 영화의 개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면이 크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 고등학교 3학년 소년 이창우가 교육 실습 업체에서 사회생활을 익혀 가는 동안 자신의 독립적 주체성을 키우고 여러 아픔을 겪는 성숙의 과정을 다양한 소리 요소와 관련지어 보여주는 영화로 분석될 때, 그 변별적 가치가 한층 정확히 도출된다. 영화의 소리는 크게 노동의 기계음, 인간의 말소리, 기타의 선율선으로 나누어진다.
영화는 기계의 일정한 작동을 통해 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면서 시작한다. 이 소리는 주인공 창우와 친구 김우재가 특성화고의 작업 실습 교육 차원에서 연습하는 기계 조작으로부터 나는 소리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특성화고의 주된 교육 목표가 직업인으로서의 전문 기술을 익히고 빠른 취업을 돕는 데에 놓여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오프닝 씬은 영화의 노동 영화적 성격을 기계음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고교 교사가 정규직 취업, 대학 진학, 병역 특례에 유리한 기계 제작 중소 업체를 창우에게 추천하나, 창우는 자신의 내신 성적과 자격증 수가 저조함을 걱정하면서 그 업체에 갈지 망설인다. 창우는 그 업체에 관한 문제로 어머니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창우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점차 사라짐을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그 업체에서 현장 실습을 이수하기를 선택할 뿐만 아니라, 실습 초기에는 구경만 했던 지게차 운전을 직접 할 수 있게 된 데다가, 실습 업체의 대표와 만나 근로계약서를 쓰고 대학에도 진학하는 의연한 결정을 내린다.
창우의 독립적 주체성이 성숙해졌음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은 그가 자신의 원래 담당 보직을 용접 업무로 변경하는 부분이다. 이 선택이 실행되는 데에 제일 결정적으로 작용한 요소는 직장 상사 송 대리의 극언이다. 송 대리는 자기의 직장 부하에 값하는 격인 창우와 우재를 상당히 감정적으로 대한다. 송 대리는 꼼꼼히 일하는 만큼 업무 속도가 비교적 느린 창우에게는 더 빠르면서도 적당히 대충 일하라고 잔소리한다. 반면에 엉성하게 일하는 우재에게는 꼼꼼히 일하라고 잔소리한다. 창우는 이러한 비일관성을 보이는 나쁜 상사를 벗어나기 위해 고교 재학 중에는 도전하지 않았던 용접 작업에 스스로 지원하는 적극성을 발휘한다.
송 대리가 뻔하게 나쁜 상사라면, 조 과장은 교묘히 나쁜 상사다. 조 과장은 원래의 시간보다 조금 이른 출근과 갑작스러운 야근 등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지시를 정당한 요구인 양 자연스레 내린다. 이 고압적 태도의 은근한 영악함은 조 과장 역의 배우 강현우의 적정한 연기에 힘입어 은근히 잘 살아나고 있다.
그렇게 갑자기 참여하게 된 야근 중, 수면 부족과 체력 감소 때문에 절단기를 떨어트려 왼팔에 상처가 생긴 창우는 부당한 업무 지시나 야근이 있었는지 질문하는 노무사에게 한동안 침묵한 후 그런 문제가 없었다고 거짓말한다. 이 침묵이 외적으로는 음성이 없는 상태이지만, 그 적막함은 창우의 내면에서 들끓는 격한 동요와 갈등을 선명히 강조하는 역설적 아우성으로 들려온다.
창우가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마음에 쌓은 슬픔과 울분은 기타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하는 듯하다. 근로 현장의 서먹한 분위기와 노동 문제를 다루는 영화에서 기타 연주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은 꽤 이색적이다. 이 장면은 노동 영화와 안 맞는 어색한 요소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특성화고 남학생이 기타 연주를 취미로 삼는 것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에서 논리적 모순은 없다.
기타 연주 장면들이 배치됨으로써 확보된 장점이 오히려 많다고 판단된다. 그가 기타로 치는 곡은 헨델의 오페라 음악 ‘울게 하소서’다. 이 곡의 깊은 애절함은 창우가 겪었을 크고 작은 아픔들을 우아하게 울리고 있다. 초중반에는 서툴렀던 창우의 기타 연주가 능숙해졌음도 엔딩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선율선의 향상은 그의 주체성이 더욱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기타를 연주하는 손과 팔이 클로즈업됨으로써, 그가 일하면서 얻은 상처들까지 보게 된다. 그 흉터의 율려가 오랫동안 명징하게 마음에 울리었다.
영화 ‘3학년 2학기(2024)’ 줄거리
특성화고 남학생인 이창우(유이하 배우)와 김우재(양지운 배우)는 여느 열아홉 남학생처럼 대학 입시, 아르바이트, 병역 문제에 한창 관심이 큰 친구 관계다. 둘은 3학년 2학기에 기계 제작 중소 업체에서 현장 실습 교육을 이수하게 된다. 무뚝뚝한 실습 도제 남학생 박성민(김성국 배우)과 직장 내 정보에 밝은 여학생 정다혜(김소완 배우)가 고3 또래로 일하고 있는 그 업체는 창우와 우재에게 학교보다 힘든 사회다.
은근히 압박을 주는 조 과장(강현우 배우)의 부당한 업무 지시와 송 대리의 거친 언행은 창우와 우재를 괴롭힌다. 작업장에는 사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 구역까지 있다. 우재는 결국 송 대리에게서 심한 모욕을 듣고 실습을 그만둔 뒤, 자기 아버지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반면, 창우는 수호(유명조 배우)의 근로 중 사망, 부조리한 야근 중의 부상, 무리한 출근을 겪으면서 실습을 버텨 나간다.
실습이 끝날 즈음에 현장 방문을 나온 노무사는 창우·성민·다혜에게 실습 업체의 문제에 관해 묻는다. 성민은 작업장의 위험 구역 등 업체의 문제를 노무사에게 털어놓고 퇴사한 후, 배달부 일을 시작한다. 창우는 실습 업체의 정직원이 되는 근로계약을 맺고 대학에도 간다.
이란희 감독 소개
이란희는 자신이 각본과 감독을 담당한 단편 영화 ‘천막(2016)’에서 기타와 타악기를 연주하는 길거리 공연으로 노동 시위 비용을 모금하는 세 남성 노동조합원의 갈등을 다룬 바 있다. 그녀가 감독한 장편 영화 ‘휴가(2021)’는 정리해고 문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남성 노동조합원의 생활고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목공업장 경영주 측이 산업재해 문제를 부당하게 처리하는 노동 문제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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