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영화는 과거가 현재에 잔존함을 알게 한다. 1995년의 두 상흔이 현재 일본 사회에 여전히 잔존하는 상태다. 한 상처는 한신 대지진이고, 다른 한 상처는 옴진리교 지하철역 사린 가스 테러다. 이 두 거대 트라우마의 여진이 생존 피해자들에게 잔류함을 잊지 않으려는 한 영화가 잊히지 않는다.
아오야마 신지가 각본과 감독을 겸한 영화 ‘유레카(EUREKA.2000)’가 26년의 세월을 넘어 해일처럼 한국에 다가온 상황은 자못 묵중하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도 각종 지하철역 살인사건의 여파가 잔존함을 헤아릴 때,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얼마나 세심히 돌봤는지 반성하게 돼서 그렇다. 이 반성 자체가 남겨진 이들에게 과한 부담은 되지 않을지도 숙고하게 된다. 이렇게 조심히 반성하고 숙고하는 까닭은 ‘유레카’가 사려 깊은 반성과 숙고를 휘돎으로써 그런 성찰을 스스로 진중히 실천한다는 판단에 있다.
이 진정성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위한 선의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레카’는 사회적 참극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에 연루된 가해 양상과 그 양상에 관한 깊은 성찰을 이미지의 물성, 배우의 육체, 연출의 기법과 정합하게 관련짓는 데에 빼어난 성취를 얻었다고 평가된다. 사회와 그 동시대 영화 간의 영향 관계를 고려해 현실을 그와 유관한 영화 내적 요소에 정확히 접속시키면, 이 평가는 더 유효해질 만하다. 아오야마 신지가 감독한 영화 ‘차가운 피(1997)’에서 방독면이 보이는 것과 사이비 종교 교주 쿠니히로가 괴한의 총격으로 죽는 것도 독가스 테러를 범한 옴진리교 교주가 사형 처리된 현실을 교묘히 변용한 것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참극의 상처가 사진의 바랜 빛처럼 변하면서까지 살아남듯, 버스 테러는 그 생존자 마코토·나오키·코즈에의 생에 영원한 상흔을 새긴다. 이 돌발 테러는 일본 사회가 겪었던 두 참사의 영향권 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영화의 화면이 옅은 황토색을 띠는 이유는 명확하다. 트라우마의 잔존 양태가 세피아 모노크롬 이미지로 화면에 입혀졌기 때문이리라. 영화에 나오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는 트라우마를 최대한 변형 없이 보존하고 기억하려는 의도가 투영된 장치일 것이다.
세상의 잘못된 관심도 세 생존자에게 해를 입힌다. 마코토는 거주 지역에 출몰하는 살인마로 몰릴 수 있다는 말을 들을뿐더러, 친분 있던 여인이 살해되자 형사의 의심까지 받게 된다. 나오키와 코즈에는 무관심을 받는다. 사건 후 2년이 흐르는 동안 부친의 사망과 모친의 가출을 겪고 버려진 이 오누이의 집은 폐기물로 차게 된다. 심지어 코즈에가 그 사건에서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난다. 이 소문도 피해자의 진짜 상황이 고려되지 않은 헛소문이라는 점에서 무관심의 결과다.
반면, 남매가 만든 네 봉분은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순박한 애도에 값한다. 그래서 그 봉분들에 강한 빛이 비쳐 짙은 그늘이 지는 장면은 넓은 해석을 허용하는 듯하다. 이 장면은 그 희생자들을 향한 경솔한 관심이 지나칠수록 악의 어둠이 짙어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다.
상처와 무관심이 악을 배태함은 나오키의 살인을 통해 충격적으로 표출된다. 무표정과 침묵을 얌전히 지키던 나오키여서 그의 범죄는 더 충격적이다. 이는 상흔을 앓는 피해자가 사회에 또 다른 파란을 일으키는 상흔이 될 수 있기에 피해자를 위한 진실한 지속적 돌봄이 간청됨을 알려준다. 마코토가 그런 나오키를 경찰서로 인계하는 것도 그가 더는 나쁜 길로 안 빠지게 하려는 윤리적 책임의 발로에 가깝다.
나오키가 상흔 자체의 육화를 피 서린 얼굴로 의미한다면, 코즈에는 바닷물에 몸을 담가 상흔을 체화한다. 큰 해일이 다가오고 있으며 언젠가 분명 모두 없어질 것이라는 그녀의 음성으로 영화가 시작함을 기억할 때, 해일과 지진의 근원인 바다로 그녀가 들어가는 행위는 트라우마의 재경험을 통해 그 트라우마를 담담히 대할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테러 현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코토의 제안으로 성사된 버스 여행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도, 그 제안을 들은 남매가 순순히 버스에 탄 것도, 나오키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마음껏 돌린 것도 모두 트라우마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희망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 희망은 버스 여행 곳곳에 깔린 밝은 멜로디의 음악으로 부드럽게 연출된다. 이 연출은 피해자의 아픔을 일회적 동정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게 돕는다. 영화는 고통을 함께 앓으면서 버텨 가겠다는 지속적 동행을 택한다. 마코토와 나오키가 서에 가기 전, 각자 자전거를 타고 빙빙 휘도는 장면은 그 지속적 동행의 실천으로 해석된다.
엔딩 씬은 각별하다. 명랑한 멜로디의 배경 음악이 흐르는 엔딩에서는 집에 돌아가자고 외치는 마코토에게 달려가는 코즈에의 얼굴 정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잡히면서, 화면 톤이 유채색으로 전환되고 공중에서 빙빙 휘도는 카메라가 그 두 명을 담는다. 이 엔딩은 영화가 자신이 견지한 희망과 태도를 실천한 연출의 총체로 평가된다. 세피아 톤이 컬러로 바뀜으로써 영화 안팎이 만나고, 공중회전 쇼트는 생존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앓아 가겠다는 감독의 윤리를 뚜렷이 반영한다. 이 윤리적 의지의 감동이 휘몰아치는 해일과 깊은 상흔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잔존할 것 같다. ‘유레카’는 빛바랜 상흔으로부터 휘도는 여파의 영화다.
영화 ‘유레카(2000)’ 줄거리 요약
버스 테러 생존자인 나오키·코즈에 남매와 버스 기사 사와이 마코토는 테러 발생 2년 후에 마코토의 제안으로 테러가 일어났던 곳으로 가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버스 여행을 간다. 셋은 테러의 상흔을 지닌 채 2차 가해 수준으로 왜곡된 세간의 관심으로 힘든 생을 겪고 있었다. 여행 중의 어느 밤, 나오키가 돌연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일이 생긴다. 그는 밤에 여성을 미행해 살해한 범인이었다. 마코토는 나오키의 살인미수 현장을 목격하고 나오키를 경찰서로 데려간다. 화산과 바다와 산에 간 마코토와 코즈에가 집으로 돌아가는 엔딩에서 영화 제목이 뜬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새드 배케이션(2007)’에도 모친에게서 버려진 버스 납치 테러 생존자 타무라 코즈에가 나온다. 이 여성 인물 역의 배우도 미야자키 아오이로, 그녀는 영화 ‘유레카(2000)’에서도 코즈에 역을 담당했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