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을 하지 않는 제약회사는 죽은 기업입니다.”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가 생전 남긴 이 말은 한미약품이 어떤 회사였는지를 보여준다. 실제 한미약품은 국내 제약업계가 복제약 경쟁에 집중하던 시절에도 연구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았고 한국 제약산업 글로벌 기술수출 신화를 만들어냈다.
국내 대표 제약·바이오 연구개발(R&D) 기업으로 성장한 한미그룹. 이제 그 바통은 신약 후보물질의 가치를 읽어내는 사업개발 전문가 김재교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 부회장에게 넘어왔다.
2025년 3월 한미약품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로 선임된 김 부회장은 오너 일가가 아닌 외부 출신 전문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룹의 컨트롤타워를 맡았다. 경영권 분쟁과 상속세 이슈를 지나 새로운 50년을 준비해야 하는 한미그룹의 미래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용왕산 자락 타운하우스
그가 거주하는 곳은 서울 양천구 목동e편한세상이다. 용왕산 자락에 위치한 이 단지는 지상7층~15층, 8개동, 총 276가구 규모로 조용하고 안전한 입주민 전용 타운하우스 느낌을 주는 곳이다.
특히 지상에 차가 다니지 않도록 설계되어 내부 정원이 쾌적하고 독립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울러 철저한 출입 통제를 통해 외부와 분리된 프라이빗한 주거 환경이 특징이다.
목동 재건축 단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쏠리는 편이지만 40평형 이상 중대형 평형이 전체의 80%를 차지해 희소성이 높은 단지로 알려졌다. 여기에 목동 학군과 풍부한 생활 인프라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단지 뒤편으로는 용왕산 근린공원이 이어지고 주변은 차분한 주거환경을 형성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2016년 12월 전용면적 156.54㎡(약 47평) 세대를 8억7000만 원에 매입했다. 현재 시세는 20억 원 안팎으로 평가된다.
제약통 투자·사업 전문가
1967년생인 김 부회장은 경북대 신문방송학과를 1990년에 졸업한 뒤 같은 해 11월 유한양행에 입사했다. 이후 30여 년 동안 경영기획과 글로벌 전략, 인수합병(M&A), 투자, 기술수출 업무를 맡으며 국내 제약산업의 성장 과정을 현장서 경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연구개발의 가치를 사업으로 연결하는 능력 때문이다. 유한양행 재직 시절 그가 주도한 투자와 기술수출 규모는 개발 단계 달성 시 받게 될 금액을 합산해 약 4조 원에 달했다. 특히 폐암 치료제 레이저티닙의 기술수출은 국내 제약산업 역사에 획을 그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당시 레이저티닙은 완성된 의약품이 아니라 임상 단계 후보물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바라볼 때 김 부회장은 데이터 속에서 가능성을 읽었다. 임상 결과와 시장 규모, 경쟁 약물, 특허 전략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신약 물질의 가치를 평가했고 끝내 대형 기술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
메리츠증권 부사장을 거쳐 2025년 3월 한미약품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로 선임된 그는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글로벌 빅파마로 도약할 때’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한미그룹은 위대한 50년의 역사 위에 혁신적인 글로벌 신약 개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한다”며 포부를 밝혔다.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최근 한미사이언스 보통주 1000주를 장내 매수하며 책임경영을 몸소 실천했다. 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따르면 주당 취득 단가는 3만1400원으로 총 매입 금액은 약 3140만 원 규모다.
이번 매수로 김 부회장의 보유 주식 수는 기존 8494주에서 9494주로 늘어났다. 취득일 종가 기준으로 보유 지분 가치는 약 3억 원 안팎으로 평가된다. 업계에서는 회사의 성장 가능성과 미래 가치에 대한 경영진의 자신감을 보여 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살아있는 제약기업 추구
한미약품의 역사는 사실상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1973년 설립된 한미약품은 동대문의 작은 약국에서 출발했다. 남보다 한발 앞서 시장과 제품의 동향을 읽어낸 임 회장은 단지 약을 파는 데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는 R&D 기업을 꿈꿨고 국내 제약업계가 복제약 중심의 출혈 경쟁에 매몰되어 있던 때에도 R&D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생전 임 회장은 “제약회사의 미래는 연구소에 있다”며 매출보다 연구개발 역량을 중시했다. 실제로 한미약품은 매출의 상당 부분을 연구개발에 재투자하며 좌제와 발포정, 연질캡슐 등 차별화된 제형 기술을 선보였고 이후 바이오신약과 혁신신약 개발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 결실은 2015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한미약품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글로벌 제약회사 사노피와 약 4조8000억 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했고 이어 얀센과 일라이릴리, 베링거인겔하임 등 글로벌 제약사들과 잇따라 대형 계약을 맺었다. 한국 제약산업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물론 일부 프로젝트는 권리가 반환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한미약품은 실패를 손실로 보지 않았다. 축적된 임상 경험과 연구 데이터를 다음 프로젝트의 자산으로 활용했다. 국내 제약업계에서 한미약품이 ‘R&D 명가’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김재교 부회장은 임성기 회장이 남긴 유산을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부회장은 메리츠증권 재직 당시 “바이오기업의 가치는 재무제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임성기 창업주가 신약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김 부회장은 그 연구개발이 만들어낸 데이터를 글로벌 시장의 가치로 전환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취임 후 그는 기획전략본부와 이노베이션본부를 신설했다. 연구개발 자산을 글로벌 사업화와 연결하기 위한 조직 개편이었다. 좋은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빅파마와 협상하고 라이선싱하며 투자와 연결해야 비로소 기업가치가 완성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 한미약품은 올 6월 초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와 최대 12억6000만 달러(약 1조9000억 원) 규모의 소네페글루타이드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소네페글루타이드는 장 기능이 저하된 단장증후군 환자의 영양 흡수 능력을 개선하는 바이오 신약 후보물질이다. 한미약품의 독자 플랫폼 기술인 랩스커버리가 다시 한번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랩스커버리는 바이오의약품의 약효 지속시간을 늘리는 한미약품의 핵심 플랫폼 기술이다.
김 부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있다. 한미그룹은 비만·대사질환을 차세대 성장축으로 삼고 있다. 특히 식사 후 분비되어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GLP-1 기반 비만 치료제를 비롯해 식욕 억제와 에너지 소비를 동시에 극대화하는 삼중작용제, 근육 손실을 줄이는 차세대 비만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 AI 헬스케어와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기기, 컨슈머 헬스케어로의 사업 영역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제약 공법의 정밀 포뮬러를 화장품에 결합한 더마코스메틱 브랜드 ‘아데시(ADESII)’를 선보이며 소비자 접점까지 넓혔다. 약을 만드는 기업을 넘어 건강과 삶의 질 전반을 관리하는 헬스케어 뷰티 기업으로 진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한미사이언스가 추진하는 ‘사업형 지주회사’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해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는 매출 1조3568억 원, 핵심 사업회사인 한미약품은 매출 1조5745억 원을 기록하며 탄탄한 성장세를 증명했다. 지주사는 전략과 투자 기능을 강화하고 사업회사는 연구개발과 상용화에 집중하는 구조를 구축해 2030년 그룹 매출 5조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글로벌 밸류업 도전
제약산업에서 신약 하나가 탄생하기까지는 통상 10년 이상의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성공 확률은 1만 개 후보물질 가운데 2~3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험이 크면 보상도 큰 법. 누군가는 그 가능성을 읽어야 한다. 임성기 회장이 한국 제약산업에 연구개발이라는 씨앗을 심었다면 김재교 부회장은 그 씨앗이 만들어낸 데이터를 세계 시장의 가치로 환산한다.
목동 용왕산 자락의 차분한 주거지에서 시작된 그의 시선은 이제 미국과 유럽, 글로벌 빅파마의 협상 테이블을 향하고 있다. 한미그룹의 다음 50년은 새로운 신약을 만드는 연구자의 손끝뿐 아니라 그 가치를 읽어내는 경영자의 안목 위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한미그룹의 미래는 그 안목을 중심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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