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패션산업의 역사는 화려하지만 동시에 잔혹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브랜드들이 소비 트렌드 변화와 글로벌 경쟁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사라졌고 수많은 기업들이 부침을 겪었다. 특히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온라인 소비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곡점은 패션업계를 수차례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별은 빛난다.” 김창수 F&F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남들이 위기를 이야기할 때 기회를 발견했고 모두가 정답이라고 믿는 길을 갈 때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그 선택은 한국 패션산업의 지형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F&F는 MLB와 디스커버리, 세르지오 타키니, 듀베티카, 테일러메이드 등을 보유한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성장했다. F&F의 사명은 Fashion과 Forward의 앞 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패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패션산업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겠다는 비전이 담겨 있다.
F&F는 지난해 1조9000억원이 넘는 매출과 46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국내 패션업계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MLB는 중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며 국내 브랜드를 넘어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2023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부호 순위 20위에 이름을 올렸던 김 회장은 최근 AI·반도체 중심의 자산 재편 흐름 속에서 순위가 뒤로 밀렸지만 기업 경쟁력 자체는 견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패션산업 혁신가
김 회장은 1961년생으로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동성고를 거쳐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부친은 삼성출판사를 창업한 고(故) 김봉규 회장이다. 현재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삼성출판박물관이 있다.
김 회장이 처음부터 패션 사업가였던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그가 한 사업은 문구 전문점 아트박스였다. 당시만 해도 아트박스는 평범한 문구점이 아니었다. 젊은 세대의 취향과 디자인 감각을 읽어내야 하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에 가까웠다. 훗날 김 회장이 보여준 브랜딩 감각의 출발점 역시 이 시기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출판과 문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가업 속에서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패션산업 혁신가로 그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전환점은 1992년이었다. 당시 세계 패션계를 휩쓸던 이탈리아 브랜드 베네통을 국내 시장에 도입한 것이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본격화되던 시기 베네통은 강렬한 원색 디자인과 파격적인 광고 캠페인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을 상징하는 글로벌 아이콘이었다.
베네통 성공 이후 시슬리, 레노마스포츠, 엘르스포츠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그는 업계에서 라이선스 사업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발상의 전환
그러나 진짜 엘도라도는 따로 있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 체결한 미국 프로야구 MLB 라이선스 계약이다. 당시 업계에서는 미국 프로야구 리그 로고를 패션 브랜드로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었다. 대부분은 야구 모자 정도를 떠올렸지만 김 회장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스포츠를 본 것이 아니라 문화를 봤다.
마침 박찬호라는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MLB는 더 이상 야구 리그가 아니라 젊음과 글로벌 감성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MLB는 모자를 넘어 티셔츠, 신발, 가방, 아우터까지 확장되며 거대한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 F&F 매출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핵심 브랜드가 된 배경에는 스포츠를 패션으로 읽어낸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2012년 론칭한 디스커버리도 마찬가지다. 당시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노스페이스, K2, 블랙야크, 네파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업들은 더 높은 산, 더 극한의 환경을 견디는 기술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남다른 질문을 던졌다.
“정말 소비자들은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옷을 입는가.” 그의 답은 ‘라이프스타일 아웃도어’였다. 정복과 도전이 아니라 일상과 여유를 선택했다. 자연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즐기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한국인의 감성을 브랜드에 담았다. 디스커버리는 2017년 롱패딩 열풍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국내 아웃도어 시장 최상위 브랜드로 올라섰다.
김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늘 일관된 패턴을 보여준다. 대다수 경영자가 브랜드의 네임밸류나 상품의 기능성에 매몰될 때 그는 그 브랜드 이면의 문화를 통찰하고 소비자의 감성을 읽어내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한남동 비즈니스 무대
김 회장이 선택한 보금자리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최고급 주거단지인 나인원한남이다. 김 회장은 2022년 3월 전용면적 244.822㎡(74평) 규모의 펜트하우스 한 호실을 분양받았다. 가격은 144억 원에 달했다. 현재 시가는 250억 원에 육박한다.
나인원한남은 과거 미군 외국인 아파트 부지를 재개발해 조성된 최고급 주거단지다. 총 341가구로 구성돼 있으며 대부분이 60평 이상의 대형 평형이다.
실내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 실내 골프연습장, 게스트하우스, 프라이빗 파티룸은 물론 조식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갤러리아가 운영하는 고메이494 한남과 블루보틀, 유명 베이커리 등 수준 높은 상업시설도 단지 안에 있다. 철저한 보안 시스템과 층별 단독 엘리베이터는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슈퍼리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곳의 진짜 가치는 입지에 있다. 한남동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동네다. 외교관과 글로벌 기업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살고 있다. 전통적인 부촌인 성북동과 평창동이 ‘조용한 부’를 상징한다면 한남동은 세계와 연결된 ‘열린 부’를 상징한다.
김창수 회장의 경영 철학도 이와 닮아 있다. 그는 늘 서양 브랜드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전략을 강조해왔다. MLB는 미국 프로야구 리그다. 디스커버리는 미국 다큐멘터리 채널이다. 원래 패션 브랜드가 아니었던 이들을 일상복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문화의 재해석이었다.
이 같은 맥락은 한남동이라는 공간에서도 발견된다. 한남동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로컬과 글로벌 문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지역이다. 오래된 주택가 옆에 세계적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들어서고 한국적 감성을 담은 공간과 해외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같은 거리를 공유한다.
김 회장이 한남동에 잇따라 브랜드 거점을 구축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F&F는 이곳에 MLB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스타디움을 모티브로 한 이 매장은 단순 판매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 세계관을 경험하는 문화 플랫폼에 가깝다. 한정판 컬렉션과 팝아트 전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글로벌 서비스까지 갖추며 한남동 특유의 분위기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지난해 9월에는 세르지오 타키니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도 문을 열었다. 이탈리아 클래식 테니스 헤리티지를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우드와 패브릭 중심의 따뜻한 인테리어, 편안한 휴식 공간은 브랜드 철학을 경험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F&F 특유의 접근법을 보여준다.
김창수 회장의 성공 비결은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싶어 하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가를 읽어낸 데 있다. 그는 패션을 의류산업이 아닌 문화산업으로 바라봤고 제품에 담긴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나인원한남 역시 비슷하다. 단순히 최고급 마감재와 넓은 평면 때문에 선택받는 곳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중심에 있다는 상징성 때문에 선택받는다.
김창수 회장이 한남동에 거주하고, 한남동에 브랜드를 심고, 한남동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남동은 세계의 문화를 한국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그의 경영 철학이 가장 압축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다.
패션업계의 수많은 별들이 사라진 뒤에도 김창수 회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트렌드를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한남동은 현재 그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무대가 되고 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별빛이 더욱 선명해지듯 F&F는 한국 패션산업의 역사 속에서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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