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 애리는 오랫동안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다고 생각한다. ‘탈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것들을 보는 삶이라고, 그는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린다.
그의 이름은 애리.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가기에 익숙지 않은 이력을 지녔다.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생각한다. 공동생활 공간에 익숙해진 애리는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텅 빈 방’이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존재의 자기 추구를 위해서는 그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다시 환기시킨다.
이야기는 이제 애리로 하여금 이름이, 여기서는 좀 따분하게 느껴지는 선호와 만나게 하는데, 커피가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커피 재료비가 비싸졌다는 얘기는 이 소설에서 처음 보는데, 선호는 그런 커피 대신에 커피 맛을 내는 세계적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이다.
선호와의 이야기 중에도 애리는 ‘연고도 없고 관심도 없던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도 ‘일을 할 곳’ ‘잠을 잘 곳’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호사스러운 자기만의 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원두커피 이야기며, “일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해요”라고 말하고 싶은 애리에 대한 설명은 어려서부터 국제학교에 다녔다는 선호와 대비를 이룬다. 이건 혹시 계급 얘기인가, 의심하게 한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애리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잠이라는 갈 곳’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게 하는데, 이 대목에서 선호는 애리가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낀다고, 작가는 애리의 시선을 빌려 판정한다. 대신에 애리는 자기가 먹는 것은 사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한다.)
선호가 출장 갈 때면 애리가 그의 텅 빈 방을 지켜주고, 또 선호는 애리에게 바닷가 별장 같은 아버지의 별채를 같이 이용하자고도 한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 않으며, ‘성관계는 없었다‘는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왜 헤어지는가. 내 생각에,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조차 성립했음에도 진정으로 교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호의 책임인가. 글쎄, 그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애리 탓인가. 그렇게 보인다. 애리는 나중에 선호를 생각하며, 놀라울 것까지는 아니지만, ‘비웃음’마저 띄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잘 사는 인간을 애리는 결코 이해할 수도, 근원적으로 가까이할 수도 없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존재의 불안까지 느끼다니. 선호 말이다. 그러나 애리의 탓만도 아니다. 작가가 애리를 빚어낸 것이다.
이런 인물들을 만날 때, 우리는 옛날 황석영의 ‘섬섬옥수’에서 그랬듯 빈자에 공감한다. 마치 윤리적 준칙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라면 다르게 판단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른바 ‘르상티망(ressentiment)’을 말했다. ‘힘없는 사람이 직접 행동하지 못하고, 오래 쌓인 원한·시기·복수심을 도덕으로 바꾸어 자기 정당화하는 심리’ 말이다. 애리는 자기 긍정보다 타자의 부정이 세어 보이기도 한다. 이 애리를 빛나게 해준 것은 작가의 ‘사과’의 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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