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지주 회장들의 연임은 단순히 임기를 한 번 더 이어가는 절차가 아니다. 수백조 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그룹의 미래 전략과 자본시장의 신뢰를 다시 평가받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올 9월11일 결정될 KB금융그룹 회장 선임은 금융권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KB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는 최근 양종희 회장을 포함한 차기 회장 후보군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검증 절차에 돌입했다. 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 관심을 두는 분위기다. 양 회장 취임 이후 KB금융이 보여준 경영 성과가 워낙 뚜렷해 현직 최고경영자를 교체해야 할 명분을 찾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 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KB금융은 국내 금융그룹 정상에 올라섰다. 2023년 리딩금융 지위를 탈환한 데 이어 2024년과 2025년까지 3년 연속 순이익 1위를 기록하며 경쟁사와 격차를 벌렸다. 올해 역시 금융지주 역사상 처음으로 연간 순이익 6조 원 돌파가 유력하다. 실적뿐 아니라 주가와 기업가치, 주주환원 정책까지 개선되면서 시장의 평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시스템을 만들 줄 아는 리더
양종희 KB금융그룹 회장은 1961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1980년 전주고, 1987년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1997년 서강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주택은행에 입행해 재무와 전략 부서의 요직을 거치며 그룹 내 대표적인 ‘재무·전략통’으로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양 회장은 KB금융 역사상 첫 행원 출신 수장이기도 하다. 2023년 선임 당시 핵심 계열사인 국민은행장을 거치지 않아 금융권에서는 신선한 이변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2015년 말부터 약 5년간 KB손해보험 대표를 맡아 뛰어난 경영 능력으로 그룹의 비은행 부문을 크게 성장시켜 주목을 받았다.
양 회장의 경영 성적표는 금융권 최고경영자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 취임 첫해인 2023년 KB금융은 당기순이익 4조5948억 원을 기록하며 리딩금융 자리를 탈환했다. 2024년에는 5조782억 원으로 국내 금융지주 최초 순이익 5조 원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에는 5조8430억 원으로 다시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올해도 1분기에만 1조8924억 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금융지주 최초 연간 순이익 6조 원 클럽 가입이 유력한 것으로 전망된다.
더 주목받는 부분은 기업가치의 변화다. 국내 금융주는 오랫동안 저평가 업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장부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양 회장 취임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적극적인 밸류업 정책과 자사주 매입·소각, 안정적인 배당 확대가 맞물리면서 KB금융은 국내 금융지주 가운데 처음으로 PBR 1배 시대를 열었다. 올 2월11일 시가총액 역시 60조 원을 돌파하며 국내 금융산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주주들의 반응도 이례적이었다. 3월26일 서울 여의도 본점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한 주주가 “지난해 주총 때보다 주가가 두 배 가까이 오른 것은 안정적이고 투명한 지배구조 덕분”이라며 경영진에게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국내 주주총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지난해 총주주환원율은 약 52% 수준까지 확대됐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 역시 1조 원이 넘는 업계 최대 수준이었다. 지난달 KB금융 외국인 지분율이 사상 처음으로 80%를 돌파한 것도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 같은 경영 전략을 높게 평가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양 회장은 외형 확대보다 수익구조의 체질 개선에도 공을 들였다. 은행 의존도를 낮추고 증권·보험·자산운용 등 비은행 계열사의 경쟁력을 높이며 그룹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했다. 동시에 글로벌 사업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전략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등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고 인도와 미국까지 사업 기반을 넓히며 미래 성장동력을 키웠다.
이 같은 성장 전략의 중심에는 ‘생산적 금융’이라는 철학이 자리한다. 양 회장은 생산적 금융을 특정 산업에 대한 지원 정책이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금융 본연의 역할로 정의한다. AI와 반도체, 바이오 같은 첨단산업뿐 아니라 고용을 창출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까지 폭넓게 지원해야 지속 가능한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KB금융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2030년까지 모두 110조 원 규모의 생산적·포용적 금융을 공급하기로 했다. 전략산업 육성과 국민성장펀드 조성, 그룹 자체 투자 등을 통해 혁신기업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AI 중심 산업 전환에도 자금을 적극적으로 공급할 계획이다.
생산적 금융은 7월8일 문을 연 전북혁신도시 KB금융타운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과 연계한 자산운용 금융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KB국민은행과 KB증권, KB손해보험, KB자산운용 등 주요 계열사가 입주했고 약 350명의 그룹 직원이 상주한다. 자산운용 산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금융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전략이다.
KB금융은 이곳에서 자산운용 업무뿐 아니라 AI 기반 자산관리센터, KB골든라이프센터, 창업 지원 플랫폼인 ‘KB이노베이션 HUB’를 운영하며 지역 기업과 청년 창업 생태계 육성에도 나선다. 기후테크와 에너지, 농생명 산업 투자까지 연계해 금융이 지역경제 성장의 마중물이 되도록 설계했다. 금융회사가 수도권을 넘어 국가균형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양 회장의 경영철학이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약 18억9000만 원의 보수를 받은 양 회장은 화려한 언변보다 치밀한 전략과 현장 중심의 소통을 중시하는 최고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전략기획과 리스크 관리, 비은행 계열사 경험을 두루 거친 그는 ‘실적은 시스템에서 나온다’는 원칙 아래 KB금융의 체질을 바꾸는 데 집중해 왔다.
K-아파트의 진화
양 회장의 경영철학은 그가 선택한 주거 공간에서도 일정 부분 엿볼 수 있다. 양 회장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개포자이프레지던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포주공4단지를 재건축해 2023년 입주를 시작한 이 단지는 3375가구 규모의 대단지로 강남권 신축 아파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다.
개포자이프레지던스는 ‘강남 속 리조트’를 콘셉트로 대모산·구룡산의 자연환경을 살린 고급 공동주택이다. 수려한 곡선형 외관, 자연석 조경, 수경 산책로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국내 공동주택 최초로 도입된 루프탑 인피니티풀은 이 단지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419동 최상층에서 대모산과 구룡산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휴양지 리조트풍의 프라이빗 휴식 공간인 카바나와 스카이라운지까지 갖춰 기존 아파트의 개념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내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 골프연습장, 사우나, 북카페, 입주민 식당까지 갖춘 커뮤니티 시설은 프레지던스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다. 단지 안에서 운동과 휴식, 문화생활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주거공간’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K-아파트의 진화를 보여준다.
양 회장이 거주하는 호실은 전용면적 78.7747㎡(약 25.4평)로 단지 내 로열동에 위치해 있다. 현재 매매 호가는 40억 원 수준이며 지난해 6월에는 35억 원에 거래됐다. 전세는 지난해 15억 원에 거래됐고 반전세는 보증금 9억 원에 월세 120만 원 수준에 계약이 이뤄졌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양 회장이 이 주택을 소유가 아닌 임차 형태로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권에서는 최고경영자들이 거액의 자금을 부동산에 묶기보다 금융자산 운용의 효율성과 거주의 유연성을 고려해 임차를 선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자산을 한 곳에 집중하기보다 유동성을 확보하고 투자 기회를 넓히려는 금융인의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개포자이프레지던스가 ‘K-아파트의 진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면 양 회장은 K-금융의 진화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포주공4단지가 시대의 변화에 맞춰 첨단 주거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듯 KB금융 역시 양 회장 취임 이후 생산적 금융과 AI 전환, 밸류업, 글로벌 확장을 앞세워 새로운 금융그룹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화려한 구호보다 구조를 먼저 바꾸고 외형 성장보다 체질 개선을 우선하는 리더십은 그의 경영 곳곳에서 확인된다. 금융을 자금 중개업이 아니라 산업과 지역, 미래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재설계하려는 시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K-아파트가 하나의 생활 플랫폼으로 진화했듯 양종희 회장이 그리고 있는 KB금융도 더 이상 은행 중심의 금융회사가 아니다. 생산적 금융과 AI, 글로벌 경쟁력을 품은 새로운 플랫폼 금융으로의 진화. 연임을 앞둔 양 회장의 진짜 과제이자 시장이 그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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