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장 받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면 나와는 안 맞는 거 같아. 그건 능력 이전에 의지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야.”
어느 날, 그는 라라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경영학 원론 교수가 수업 시간에 표시해 준 부분만이라도 공부해 오면 졸업은 시켜준다고 했어.”
그가 내민 책은 경영학 개론 원서였다. 내용을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운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경제 이론이었다. 게다가 중학생이라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 그것을 대학생이 해석 못한다고 졸업을 포기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날, 라라는 그의 시험 준비를 도와주었고, 그는 마침내 10년간 지속된 기나긴 대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기뻐 날뛰었지만 라라의 마음엔 그늘이 졌다.
‘그가 어떻게 이 대학에 왔을까?’
라라의 마음에 커다란 물음표가 또렷이 떠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미국 아닌 러시아로 함께 유학을 온 후, 라라는 준호가 사람들 앞에서 자랑처럼 떠벌리는 걸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전교 일등도 해봤고, 전교 꼴찌도 해봤어.”
그는 악마의 선물 같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떠들곤 했다.
어느 날, 라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준호에게 면박을 주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그의 거짓말에 심연 속에서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지 못했다.
“전교 일등은 전교 꼴찌를 할 수 있어. 자기가 아는 답을 다 피해 가면 되기 때문이야.
그러나 전교 꼴찌나 중간치들은 마음먹는다고 언제든지 전교 일등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수백 명의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특히 그런 외국어 실력으로는 전교 일등은 절대 할 수가 없거든. 우리 대학엘 온 것도 이상하게 생각될 경우가 있어. 왜지?”
그런데 그녀의 그 마지막 말에 준호는 움찔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유학은 가족들의 눈총을 피해 마음껏 놀 기회였다. 준호 자신에게 공부하라고 요구하는 라라는, 비록 가슴으로는 애정의 대상이었지만, 머리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더 어렵고 힘든 존재였다. 부모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한 집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리고 한 이불 속에서 그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최우수 장학금을 받으라는 요구도, 돈을 벌어오라고 요구도 아니잖아. 꼴찌를 해도 좋으니 이왕 시작한 것만 끝내자구.”
자기를 합리화시킬 방법이 없는 비겁자는 항상 그렇듯이 연약한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마련이다. 모든 파국의 시작은 준호의 폭력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보이는 것은 그의 위선이었다. 그러나 그 선량해 보이는 미소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폭행한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준호의 첫 폭행은 동거 5개월쯤 지나서였다.
“제발 공부해. 유학 온 거잖아. 지난날이야 어떠했던 새로 시작하자고 했잖아.”
그렇게 시작된 언쟁은 늘 격한 말다툼으로 번졌다. 그러다 제 분을 못 이긴 준호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자신의 변명과 거짓말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속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의 반론과 반격은 늘 매서웠다. 준호는 그것을 이기지도 견디지도 못했다. 도망쳐 빠져나갈 곳이 없었던 그가 처음 찾은 폭행의 핑계는 부부싸움에 집안 들먹이면 안 된다는 어른들 말씀이었다.
“왜 집안을 들먹이느냐구!.”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은 한 마디였다.
“너 같은 사람을 두고, 너희 집에서 그렇게 결혼을 반대했던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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