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영화 ‘기생충’의 이 대사는 지금 한국 청년들의 필수 생존 지침이 됐다. 최근 서점가와 트렌드 분석가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레디 코어(Ready-Core)’다. 준비(ready)가 삶의 핵심(core)이 됐다는 뜻. 한 마디로 “내 인생에 절대 실패나 시행착오는 없다”며 매사 완벽하게 준비하는 현상을 말한다. 주말 맛집 탐방 같은 소소한 일상부터 내 집 마련 같은 인생 계획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철저한 시뮬레이션 위에 올려두고 있다.
요즘 젊은 층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전처럼 무작정 길을 걷다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는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청년들은 캐치테이블 같은 예약 앱으로 메뉴와 내부 분위기를 미리 확인한 뒤, 자리부터 확보해야 직성이 풀린다. 놀라운 것은 인생 설계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상견례 자리에서 예비 배우자와 부모님을 모셔두고 엑셀과 노션(Notion)으로 짠 ‘인생 30년 로드맵’을 프레젠테이션했다는 일화가 화제를 모았다. 결혼 비용, 자녀 출산 시기, 은퇴 후 자산 규모까지 연도별로 촘촘하게 계량화해 둔 것이다. 그들은 오늘 할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AI 기반 일정 관리 기능으로 1년 뒤 내가 어떤 역량을 갖출지 미리 계획하고 시뮬레이션한다고 말한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30년 뒤를 바라보며 개인형 퇴직연금(IRP) 자산 굴리기에 몰두하는 사회초년생들도 이제는 흔하다.
이들은 왜 이렇게 ‘프로 준비러’가 됐을까?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위협하고, 물가는 치솟으며, 경기 침체가 길어지는 세상이다. 게다가 스마트폰만 켜면 소셜 미디어(SNS) 속 타인들의 화려한 성공 신화가 쏟아진다. 나만 뒤처지면 어쩌지, 하는 비교 심리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시행착오를 죄악시하게 만든다. 이는 위험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통제 기제다. 국가나 사회 시스템이 내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 걸 깨달은 이들이, 스스로 1인 기업이라 생각하고 철저한 리스크 관리에 나선 셈이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불안한 세상 대신, 당장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계획표에 매달리는 현상이다.
얼핏 이 트렌드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타인의 성취와 비교하는 것은 심리적 압박을 초래할 수 있다. 철저한 계획은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더 큰 강박과 불안을 낳는다. 촘촘하게 짜인 엑셀 표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만 터져도 멘탈은 무너지기 쉽다. 인생의 묘미는 계획하지 않은 길을 가다 마주치는 우연한 행운, 즉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 있다. 길을 잃어봐야 새로운 풍경도 보이고, 실패를 해봐야 면역력도 생긴다.
완벽한 계획이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조금은 내려와도 괜찮다. 과잉 준비 사회로 치닫는 한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빽빽한 계획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실패를 유연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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