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너무 안정적으로 보이고 부럽기조차 하다. 너도 잘 생각해 봐. 그런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아. 남자가 자기가 가정 책임지겠다는 거잖아.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내 남편은 나보고 밖에서 돈 벌어오래, 자기가 집안에서 살림한다고. 웃니? 농담인 줄 알았더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그걸 남녀평등이라고 하더라. 정말 짜증 나. 난 그런 남자 매력 없어 싫거든. 틀에 박힌 사고라고 비판받을지 몰라도 나는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운 게 좋아. 자연의 이치라는 거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신이 괜히 남자를 신체적으로 더 강하게 만들었겠어? 다 이유가 있겠지.”
“어머 정말, 니 남편 그렇게 안 봤더니 정말 뜻밖이다. 그렇게 덩치 크고 건장한 남자가 여자보고 밖에서 벌어오래? 자기는 집안에 있겠다고? 난 싫다. 차라리 혼자 살지.”
라라와 수연의 은밀한 대화는 그렇게 이어졌다.
**********
“혹시 임신한 거 아니니?”
라라가 임신을 원할 리 없었다. 피임도 하느라 나름 신중했다. 모스크바 지인들이 물었을 때도 아니라고 라라는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런데 임신 테스터에 반응이 두 줄 양성으로 나타났다. 숨이 탁 막혔다.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라라는 방으로 와 아직 잠자리에 누워있는 준호에게 말했다.
“임신인가 봐. 테스터가 양성이야.”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준호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
그러더니 준호는 라라를 끌어당겨 안으면서 말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기분은 좋은데.”
그가 여기서 멈췄으면 라라가 또 울화가 치밀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준호와 라라 관계에 그런 행운은 드문 일.
“아, 틀림없이 아들이어야 하는데. 내 인생에 딸은 없다. 오로지 아들 딱 하나. 꼭 아들 낳아야 해. 딸은 안 돼, 알았지. 아들이야, 아들.”
준호가 그렇게 다짐하듯 못을 박았다. 라라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톡 쏘아붙였다.
“그래, 너 같은 남자 만날까 봐 나도 딸 낳기 정말 싫다. 나도 아들 원해. 그렇지만 지금 임신하고 싶진 않아. 갑자기 이 무슨…… 흑!”
라라는 순간 울컥했다. 나이 스물일곱. 공부를 마치기 전엔 임신 계획 따윈 없었는데. 결혼이 지속될지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때에 임신이라니.
물론 기왕 임신이라면 아들이길 바라는 건 사실이었다. 그의 폭력을 처음 당한 날 이후 그녀는 여자라는 사실이 서러웠다. 준호가 그녀에게 두 번째 폭력을 쓰던 날, 라라는 결심했다.
‘난 언젠가는 널 떠난다. 반드시 떠나고 만다. 아버지 체면 때문에 지금 약혼 파혼은 못 하지만, 이혼은 할 수 있다. 결혼하더라도 나는 너를 떠나고 말 거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악마의 장난치고도 심한 일이었다.
서울에서의 결혼식조차 할 말이 없는 결혼식이었다. 결혼 기념 사진도 찍지 않고 함도 들이지 않았고 드레스도 대충 싼 걸로 임대했다.
“한복도 폐백 때나 입을 거니까.”
시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종로 한복집에 가서 제일 싼 걸로 맞췄다.
라라의 엄마는 울화를 터뜨렸다.
“내가 귀하디 귀하게 키운, 어느 동네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딸을 거지 결혼을 시키냐.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그 집은 있는 척이란 척은 다 하더니, 결혼한다면서 하는 짓 보니 세상에 그런 인색한 노랭이들이 없다. 첫딸이라 얼마나 기대가 컸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니.”
예식도 그랬는데, 신혼여행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신혼여행 대신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자는 걸로 때웠다. 모스크바로 돌아간다는 핑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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