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것은 기헌이 라라에게 각별한 감정이 있다는 걸 진옥이 서서히 눈치채기 전까지였다.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느끼게 된 진옥은 더 이상 자애롭고 다정한 언니만은 아니었다. 냉정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자존심을 다친 여자의 몸부림이라는 걸, 라라는 모르지 않아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래도 진옥은 다른 아줌마들과는 달랐다. 어떻게든 라라를 보듬으려 했다.
민라라에게 박기헌은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그녀의 연인이 되어버린 후, 그리고 진옥이 그런 미묘한 감정을 읽어내고 있다는 걸 라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진옥은 좋은 여자였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기헌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표출되곤 했다. 공연한 짜증을 부리기도 했고, 그를 마음에서 밀어내야겠다는 의무감이랄까 부담감이 그녀의 말과 행동을 지그재그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는 당황했지만 이유가 진옥 때문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미안해했다.
라라가 결국 준호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귀국하기로 결정한 데는 기헌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기헌이 그녀의 귀국에 동의한 것은 준호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폭행한 날 이후였다.
성당 청년회 야유회가 있던 날, 라라는 집에서 야유회에서 먹을 야채들을 씻고 있었다. 성당 청년회장을 맡고 있던 기헌이 라라에게 특별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라라가 정성껏 야채를 손질하고 있는 걸 보더니 준호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기헌이 시키는 일은 잘도 하는군. 집에서 밥은 안 하면서.”
“언제 안 했어. 매일 집으로 들이닥치는 사람들 밥하느라고 하루도 둘이서 밥 먹은 적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 밥하지 않겠어. 니가 지금 말한 대로. 할 일 없이 집에서 노는 사람은 직접 해서 먹으라고. 무슨 이유로 내게 해내라고 하는 건데. 곧 사람들이 올 텐데, 그러고 있을 거면, 차라리 청소라도 좀 하라구. 기헌 선배는 청소는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다고 진옥 언니가 그러더라. 기헌 선배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런 좋은 점이라도 좀 배우면 안 되나. 남자가 다 자기 할 일 스스로 알아서 하니까 여자가 존중하고 아끼는 거 아니겠어. 기헌 선배는 매일 밤늦게까지 논문 준비하느라 책 보느라고 건강 탈 나지 않을까, 그 언니가 걱정하던데, 나도 그런 걱정 좀 해보고 싶고 남편 건강 챙겨보고 싶어.”
그러자 준호가 발끈했다.
“그거야 워낙 진옥이가 남편을 잘 내조하니……”
“그럼 그런 여자 만나. 왜 나 같은 여자 찾았어. 넌 밥보다 섹스를 더 좋아하잖아.”
준호는 이미 분노인지 흥분인지 모르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 준호를 가증스럽다는 듯 라라는 바라보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네가 학력을 속이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너랑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어. 지금 누구한테 엉뚱한 트집을 잡는 거야. 웬 적반하장?”
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열린 문으로 들어서던 백성만이 보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백성만이었다. 그동안 백성만은 라라를 아끼면서도 남자로서 준호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학업에 성실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인물 좋고 성격 좋잖아요.”
그런 백성만에게 자그마한 여자를 거구의 남자가 폭행하는 모습은 상상 못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나 원 참 이거야. 어째야 할 줄을 모르겠네. 아니 어쩌다 이러신 겁니까. 이건 좀 심하군요.”
그는 할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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