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폭행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기대 이하더군. 지금껏 그런 짓을 계속해 온 거였어? 그걸 라라가 참았다는 걸 진옥이조차 믿기 어려워하더군. 차라리 이혼이 서로에게 좋을 거 같다고 진옥도 그러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더 이상 여기서 그가 공부 마치기를 기다린다는 건 시간 낭비 같아.”
그에 대한 답이라도 되는 양 라라가 기헌에게 밝혔다.
“저 서울에 방송국 일자리가 생겼어요. 가는 걸로 결심했어요.”
라라가 귀국하기 며칠 전, 박기헌은 라라에게 아르바트 거리에서 보자고 했다.
“외무성에 스탈린 시대 한반도 관련 외교 문서들을 찾으러 자주 아르바트에 와.”
기헌은 마주 앉은 카페에서 라라 앞 테이블 위에 곱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뭔가 하나 사주고 싶어서 좀 둘러봤는데, 어떤 취향인지 몰라서.”
“왜 이렇게까지?”
라라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그냥 라라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때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좋겠네.”
그날 둘은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었다.
여름의 저녁은 해가 길었지만 자정을 바라보는 모스크바 레닌 언덕에도 포근한 밤의 어둠이 내렸다.
“진옥은 연인이라기보다는 동료이고 친구 같은 존재야. 정말 좋은 사람이지.”
결국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가. 모스크바의 한 작은 호텔에서 라라와 기헌은 서로에게 신혼 같은 밤을 가졌다. 상처받은 날개를 가진 영혼을 치유해 주는 존재가 지금 기헌이었다. 그래서 그의 육체적 사랑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기헌과의 관계가 주는 행복감은 가시 돋친 장미를 손에 움켜쥔 듯한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인간인가. 답이 궁한 질책들이었다.
사랑스런 여인. 가증스런 배신자.
배신이란 말이 뇌리에 떠오르자 라라는 화들짝 경악했다. 자신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그거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금 그 하나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이 행복에는 배태되어 있었다. 고리까야 프라브다. 쓰디 쓴 진실이었다.
그러나 라라는 더 이상 준호라는 굴레에 갇히기 싫었다. 그를 위해 아니 그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가 습관이 되면 자포자기해지고 말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라라는 최근 자신이 삶을 포기하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폭행을 당하면 자존감을 잃었다.
‘저 창밖으로 몸을 던져버릴까.’
창밖을 보며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 창밖으로 몸을 던지느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편이 훨씬 낫지. 자신을 원하는 뜨거운 기헌의 손길에 이제 인형의 집을 떠나는 노라가 되어도 좋다는 결심이 섰다.
‘준호가 남편이라면, 나 라라에게는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애인이고 남편이야.’
진짜 자신을 라라의 남편이라고 하면서 돕는 사람도 있었다. 김후원이었다. 그는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입맛도 까다로웠고 여자를 보는 눈도 까다로웠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말이 곧 행동인 사람이었다. 농담과 진담의 구분 없이 떠들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준호와는 상반되는 성격이었다.
후원은 라라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왔다. 김후원은 라라의 비자 문제나 체류 문제가 생겨도 자기가 나서서 비자를 받아주었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필요하면 그는 라라를 자기 아내라고 말하면서까지 나서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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