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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이 훼손되면 나의 존립도 훼손된다
이하배의 소통과 열음…<6>소통열음 인성열음-<1>배제의 배에서 배려의 배로
이하배 필진페이지 + 입력 2015-02-28 23:19:00
 ▲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겉도는 함께
 
나뉘고 나뉘다 더 이상은 나뉠 수 없는 존재인 개인은, 그들의 모임인 사회로부터도 나뉠 수 없는 존재라 했다. 앞의 나뉠 수 없음은 끝까지 나뉘었기 때문이고, 뒤의 나뉠 수 없음은 개인의 삶이 만남과 소통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도 나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하나의 ‘반(半)-자연’이기에 ‘반(反)-자연’의 측면도 있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사회를 이루면서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IMF 규모의 막대한 녹색기후기금도 글로벌 차원에서 형성될 수 있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의 함께 사는 모습과 방식에 문제가 없는가? 우리에게 ‘함께의 크기’는 이상(異常)이 없어 그 이상(以上)일 수 없는 크기인가? 아니다. 일자리는 없고, 있어도 ‘질 나쁜 일자리’이고, 똑 같이 일해도 반만 받는 일자리가 반이다. 무엇보다, 부자는 갈수록 부하게 되고 빈자는 갈수록 빈하게 되다가, 급기야 또렷한 양극(兩極)화로 대립(對立)하게 되는 함께의 모습이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리하여 한 쪽의 삶이 어려우면 다른 쪽의 삶도 결국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 자꾸 위와 아래로 그리고 나와 남으로 ‘너무 나뉘고’ 멀어지는 함께의 모습으로 된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 함께할 수가 없는 삶이런가? 하나의 자유가 다른 하나의 자유를 막으니, 하나의 모순임에 틀림없다. 양극화, 수직주의, 주입식교육, 획일주의, 나 중심주의 등은 우리사회의 진단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기본 전제다. 이들로부터 수많은 문제들이
파생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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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학생들이 학생들을, 놀리고 때리고 빼앗고 일시키고 불안에 떨게 하고 급기야 죽게 하는 만남의 모습, 소통의 모습, 함께의 모습이 뉴스의 단골메뉴가 된 지 오래다. 이런 함께의 모습은 ‘영 아니다’. 이런 함께의 모습에서는 누구는 사람일 수 있고, 누구는 사람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 밖에서도 같다. ‘이런 함께’는, 학교의 안이 먼저일까, 밖이 먼저일까? 아니면, 둘 다 먼저? 외적 크기 속에서 외적 크기로서 외적 크기를 위해, 나와 너가 상하로 나뉘어 누르고 눌리며, 자타로 나뉘어 밀어내고 밀어내지는 함께는 ‘괜찮은 함께’가 아니다. 이런 누르고 눌리거나 밀어내고 밀어내지는 함께는 ‘밀어내는 함께’, ‘수직적 함께’, ‘따로 함께’ 내지는 ‘겉도는 함께’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 생각하는 존재, 서로 그리워하며 그리는 존재가 ‘살아가는 존재’ 사람일 텐데... 학교 안팎에서 바로 이 사람들이 사람이 살 길을 막는다. ‘살다’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하다’도 나왔다고 추정된다.
 
사랑하다에는 생각하다와 사랑하다의 뜻이 모두 있다. 사랑하면 생각 속에 온통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 그림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리하여, 어원적으로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아래라고, 남이라고, 소수라고, 다르다고 따돌리고 못살게 한다.
 
좀 긴 시간에서 본다면, 배제당하는 자는 물론, 배제하는 사람도 살기 어려워진다. 배제하는 사람도 살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우선은, 당하는 자들이 자위(自衛)하려 하고, 세상이 법으로든 도덕으로든 의(義)와 선(善)으로써 이들을 지켜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일 수밖에 없는 삶에서, 남의 삶이 훼손되면, 나의 존립기반도 함께 훼손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가 분화될수록, 나의 삶은 남들의 삶에 더욱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아가, 남들이 무시되고 배제되는 질서와 정서에서, 그들의 남인 내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위아래로 나뉜 함께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위가 아래에 더 종속된다 할 것이다. 아래가 있고나서, 아래의 위에 위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아래에서 위가 파생되었지, 위에서 아래가 파생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여기서 위아래는 부자지간의 위아래가 아니라, 군신지간의 위아래, 사회적 지위에서의 위아래를 말한다. 아들이 먼저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을 살려 주는 쪽이 인자(仁者)다. 사람들은 불인자(不仁者)를 떠나 인자에게로 몰린다며, 맹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도 했다. 이는 내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남, 나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남을 밀어낼 때, 남과 함께 나도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을 밀어 냄은, 동시에 나를 밀어 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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