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복지국가 쇠퇴의 시기이기도 하다. 2008년 이래 그 위기는 본격화되었으며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지국가라는 것은 20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 주도의 역사적 타협물이다. 19세기 이래 급격하게 이루어진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위기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강력했던 것은 빈곤이었으며,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정성 등이 반복되는 혼란의 원인으로 주목되었다.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적 감성과 질서는 도시화 속에서도 일부분 유지되었으나, 이제는 보다 포괄적이고 더 추상적인 집단감성과 정체성의 형성이 요구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기존 공동체적 질서를 대체할 ‘사회’의 역할에 주목했고 동시에 국가주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었다.
사회는 가족과 같은 일차적 준거집단을 넘어선 무엇이었지만, 동시에 시장과 같이 모든 개인을 파편화하는 공간과도 다른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사회’라는 단어를 통해 시민사회의 새로운 유대를 창안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일정한 결과물이 오늘날 ‘사회적 국가’라고 불리는 것이다.
19세기의 빈곤 문제
앞서 말했듯, 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의 흐름은 유럽문명으로 하여금 ‘빈곤’이라는 화두에 직면케 했다. 빈곤은 하층계급들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는 자유시장 경제 속에서 만인이 자유롭게 교환하고 풍요를 누릴 거라는 당대 경제학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배반의 문제가 급부상한 것은 1830년대였고, 혼란에 빠진 당대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여타의 ‘사회과학’이었다.
사회과학들 중 선두로 나선 것은 사회경제학이었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사회경제학자들은 노동계급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선’의 새로운 원리를 도입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시장은 그 자체로는 빈곤으로부터 촉발되는 위기를 온전히 정화시킬 수 없다. 완전한 자유시장의 원리보다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자선기구의 도입으로 빈곤층들의 사회통합을 견인하고, 그들에 대한 도덕적 계몽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층을 계몽적으로 견인해야 한다는 엘리트 중심적 사고를 주를 이룬 것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엘리트들조차도 빈곤문제가 개인들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짊어져야 할 공동의 문제라고 봤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에는 가톨릭의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보수주의적 접근이 존재하는 한편, 이 문제를 보다 급진화한 리버럴 공화주의자들부터 사회주의자들까지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했다.
사회보험과 사회적 (복지)국가의 등장
요컨대, 빈곤의 사회문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다양한 결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선, 노동자들을 도덕적 훈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보수주의적 시선이 존재했다. 19세기의 사회적 가톨릭주의자들은 종교적 신념에 기반해 노동자들의 도덕적 계몽을 빈곤문제의 주된 해법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보다 왼쪽에서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가장 왼편에서 노동자들이 모든 자선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사회주의)과, 자선의 시혜적 원리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사회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맥락하에 ‘사회보험’의 도입을 주장하는 입장이 또한 존재했다.
이 후자의 논리가 20세기 중반을 전후로 복지국가 건설의 주된 참조점으로 부상했다. 도시화 속에서 해체된 일차적 공동체 질서를 대체할 사회적 준거집단의 형성은 크게 두 가지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류와 같이 국가나 시장질서 자체를 벗어나 형성된 집단적 관계망들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세력화가 거세게 일어났고,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영향 속에서 이러한 집단성은 공론장에 대한 강력한 영향을 갖게 된다.
다른 하나는 ‘복지’라는 이름하에 국가주도로 만들어진 제도적 관계망의 형성이다. 20세기 복지국가에서 국가는 계급 간 갈등을 조정할 제3의 세력으로 부상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본격화된 것인데, 이때 주된 화두로 부상한 것은 바로 ‘공적 의무보험’ 혹은 ‘사회보험’의 확립이라는 것이었다.
앞서 봤듯, 19세기 사회경제학은 빈곤의 문제를 자선의 시혜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반면, 사회적 보험의 도입은 빈곤 문제의 해결이 시혜가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권리의 문제라는 것, 이 권리를 보편화하기 위해 만인에게 공적으로 적용되는 의무적 보험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업수당에서부터 산재보험과 퇴직연금 등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임금’이라는 형태의 단순 보상체계를 넘어 노동에 수반되는 제반의 리스크 전반을 억제할 장치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복지는 하나의 권리로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파편화된 채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장질서 너머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대와 연대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사회’ 혹은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는 기존 공동체의 와해 이후 요구되는 이러한 새로운 연대/유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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