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1대 소지왕은 마립간계열의 세 번째 왕이다. 재위 기간은 서기 479~500년까지 22년이다. 아버지는 자비왕이고, 어머니는 미사흔의 딸 파호(巴胡)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을 보면 계보 상으로 약간 차이가 난다.
우선 소지왕의 표기가 다르다. ‘삼국사기’는 소지(炤知)마립간, ‘삼국유사’는 비처(毗處)마립간으로 쓴다. 아들 순서를 ‘삼국사기’는 자비왕의 ‘장자(長子)’이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삼자(三子)’로 기록했다. 또한 소지왕의 왕후(왕비)도 ‘삼국사기’는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 선혜(善兮)’이고, ‘삼국유사’는 ‘기보(期寶) 갈문왕의 딸’이다.
이름 비처와 소지
일반적으로 소지왕의 이름(字)은 비처(毗處), 시호(諡號)는 소지(炤知)로 본다. ‘신라사초’ 역시 이름만큼은 비처로 쓴다. 소지왕이 태어난 서기436년(눌지왕 20년) 기록은 ‘태손비처(太孫毗處)’, 소지왕이 태자가 된 459년(자비왕 2년) 기록은 ‘태자비처(太子毗處)’이다. 비처는 소지왕의 이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지는 시호가 맞을까? <소지명왕기>이다. ‘13년(서기 491년) 백양 신미 정월, 군신이 왕을 소지명왕(炤知明王)으로 존호하고 천궁을 소명천궁(炤明天宮)으로 존호해 신궁에서 길례를 행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하사했다(群臣 尊王爲炤知明王 尊天宮爲炤明天宮 乃行吉 于神宮 賜酺百官).’
군신이 살아생전의 소지왕을 ‘소지명왕’으로 존호한 내용이다. ‘소명천궁’으로 존호된 여성은 새로이 소지왕의 제1왕후(天宮)가 된 지도로(훗날 지증왕)의 딸 후황(厚凰)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기록을 준용하면 소지를 단순히 사후의 시호로 단정할 수는 없다. 소지는 생전의 휘호(徽號)이자 사후의 시호(諡號)이다. 다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지와 비처는 비치로 읽는 것이지만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비왕의 장자와 삼자
‘삼국사기’는 소지왕을 자비왕의 장자(長子)로,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삼자(三子)로 쓰고 있다. 이는 소지왕을 낳은 자비왕의 왕후 파호(巴胡)의 왕실 내 위상을 반영한 결과이다. 파호는 미사흔의 딸로 최고의 골품이다. 자비왕이 태자 시절 혼인한 태자비이다. 소지왕은 파호가 낳은 자비왕의 적장자(嫡長子)이다. ‘삼국사기’가 자비왕의 장자로 쓴 이유이다. 또한 자비왕은 소지왕을 낳기 이전에 파호가 아닌 다른 여성을 통해 아들 둘을 얻는다. 이들 두 사람은 소지왕의 이복형이다. ‘삼국유사’가 자비왕의 삼자로 적은 것은 이를 고려한 결과다.
결국 소지왕은 생물학적으로는 자비왕의 삼자이나 공식적으로는 자비왕의 장자로, 적장자이다.
소지왕의 왕후 문제
소지왕의 왕후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 선혜(善兮)로, ‘삼국유사’는 갈문왕 기보(期寶)의 딸로 적는다. 기보의 딸은 치군(齒君)을 말한다.
‘신라사초’ 기록에 따르면, 소지왕은 재위기간 중에 여러 명의 정실왕후를 둔다. 재위초기는 3궁(三宮), 재위중기는 5궁(五宮), 재위말기는 최대 9궁(九宮)까지 둔다. 이에 따라 왕후의 명칭도 다양하게 변하는데 3궁은 상(上)궁·하(下)궁·난(暖)궁이며, 5궁은 천(天)궁·지(地)궁·인(人)궁·일(日)궁·월(月)궁이다. 9궁은 천궁·지궁·인궁·일궁·월궁·춘(春)궁·하(夏)궁·추(秋)궁·동(冬)궁 등이다.
내숙의 딸 선혜의 경우, 서기 479년(소지왕 1년) 처음으로 난궁(제3왕후)에 봉해지고 480년(소지왕 2년) 하궁(제2왕후)으로 승차해 483년(소지왕 5년)에는 지궁(제2왕후)이 됐다. 그러나 선혜는 488년(소지왕 10년) ‘사금갑(射琴匣) 사건’에 연루되어 왕후에서 폐위됐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굳이 폐위된 선혜를 소지왕의 왕후로 설정한 걸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선혜는 소지왕과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는데 이가 훗날 법흥왕 모진(慕珍)의 왕후가 된 보도(保道)이다. 보도는 후일 신라 왕후 배출의 한 축인 ‘진골정통’의 핵심이 된다. 이런 까닭으로 어머니 선혜는 비록 폐위되지만 진골정통의 맥을 이은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삼국사기’는 이를 따른 것이다.
참고로 신라왕실의 왕후 배출은 ‘옥모(玉帽)’를 조(祖)로 하는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보미(宝美)를 조(祖)로 하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이 있다. 옥모는 김구도가 조문국 왕녀와 혼인해 낳은 딸이고, 보미는 미사흔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혼인한 왜국 인덕왕의 딸이다.
기보의 딸 치군의 경우 서기 463년(자비왕 6년) 처음으로 소지왕의 태자비가 됐고, 479년(소지왕 1년) 소지왕이 즉위하면서 당당히 상궁(제1왕후)에 봉해졌다. 또한 자신이 낳은 아들 아지(阿知)도 태자가 됐다. 하지만 치군은 상궁이 된 이듬해인 480년(소지왕 2년) 난산(難産)으로 사망했고, 태자 아지도 483년(소지왕 5년) 전염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삼국유사’가 소지왕의 왕후로 치군을 기록한 것은 치군이 소지왕의 정실왕후 중 최고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쉽게도 치군은 조기 사망하는 바람에 진골정통에 포함되지 못하고 탈락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서가 소지왕의 이름과 계보를 다르게 쓴 이유는 기록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후대의 정리된 기록을, ‘삼국유사’는 당대의 전승된 기록을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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