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해가 된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죽어라 욕하는 데도, 왜 역대 대통령들이 ‘굴욕 외교’를 마다하지 않았는지를.
1970년대 초 일본에서 공부할 때, 한국 정부가 보내 준 초등학교 교과서는 형편없었다. 연필로 교과서에 메모한 걸 지우면 메모뿐 아니라 교과서에 인쇄된 글자까지 지워졌고 종이는 찢어졌다. 6학년 때 조총련계 초등학교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갖고 온 북한 교과서 종이는 번쩍번쩍 했고 글자도 지워지지 않았다. 요즘 교보문고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럴듯한 책과 비슷했다.
그렇게 못 살았고 북한에도 뒤처졌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가며 수교한 것이다. 그렇게 못 살았기 때문에 수교 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이지만 어제의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을 잡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5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국회에서 연설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성할 뿐, 지난 일을 되새겨 그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려 하지 않습니다. 진실에 바탕한 두 나라 국민의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밝은 미래를 열어 갑시다.” 일본인들이 가장 감동스러워하는 연설이다.
지금의 야당과 말투가 가장 닮았던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창씨개명도 강제가 아니었다”는 망언이 나오자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발언을 한다. 그런데 1997년 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산케이 신문 기자가 ‘버르장머리’가 무슨 뜻이냐고 질문한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정치 9단의 실력이 발휘된 건지, 한·일 간 외교의 중요성을 감안한 건지 김영삼 대통령은 “한·일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동문서답을 한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1998년 일본 국빈 방문 때 일본은 도쿄에서 벌어졌던 ‘김대중 납치 사건’이 거론될까 긴장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망명 시절과 수감 생활 때 도와준 일본에 감사하다”고 했다. 또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했다. 연설 후 오부치 총리는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표현이 담긴 그 유명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신감과 혜안이 없었다면 못 이루었을 성과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심사숙고와 토론 끝에 “일본에 다시 배상하란 요구를 하는 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당시 토론에 참석했었다. 2015년 톈안먼 망루에 중국의 시진핑 주석·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박근혜 대통령이 올랐을 때 미국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비난하진 않았다. 한국 뜻을 들어주면 한·일 화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실제 그 후 한·중·일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아베 총리의 방한, 위안부 합의 등 한·일 관계 개선이 이어졌다. 이런 역사의 이어짐 속에 탄생한 것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이런 역사를 연결해 가고 있다. “피해 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부터 집어먹는 것이 바로 굴욕적 자세”라는 58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을 국무회의 발언에 담았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선 “주변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뇌에 찬 결단을 하셨다”고 했다.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UAE) 순방을 다녀온 뒤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다”고 했다. 방일한 윤 대통령은 게이오 대학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처럼 ‘미래’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그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3월 정상회담 후 52일 만에 다시 마주 앉았다. 그리고 ‘안보·경제 분야의 협력체 본격 가동’ 등 허다한 합의를 일궈 냈다. 기시다 총리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신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고, 윤 대통령은 “한국이 먼저 (과거사 얘기를) 요구한 바가 없는데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 줘 감사하다”고 했다. 이게 어른들의 대화다.
꿈을 향해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은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 낸 사람은 남을 탓하는 대신 이해하고 배려한다. “마귀 들린 윤석열이 일본에 구걸한다”는 정의구현사제단, “제2의 경술국치이자 대일 굴종 외교”라는 더불어민주당, 일본 노래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세월호 추모행사에서 부르는 사람들, 트집만 잡으며 “성과가 없었다”고 하는 일부 언론들. 이들은 과연 선배들의 고뇌와 어른들의 큰 마음과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알고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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