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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정종미의 찬란한 우리 색 찾기
신개발에 바친 교수직 퇴임 연구 전환점 삼아
본질·가치 증명하는 재료과학의 집대성 저술
정체성 연구센터 성격 문화공간 ‘정종미갤러리’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7-07 06:31:10
 
▲ 이재언 미술평론가
며칠 전 고려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 정종미 작가를 만났다. 은퇴를 맞으면서 효자동에 있는 아담한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한국화 전문 문화공간으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했던 것이다. 한옥의 정취를 잘 살린 아담한 문화공간으로 분위기가 여느 갤러리들과는 좀 다르다. 그림들도 전시돼 있지만 한국화 물감의 원료가 되는 광물 및 천연 재료들이 함께 다양하게 비치돼 있다. 색다른 복합 문화공간이다. 작가는 오랜 한국화 창작활동 외에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 나서, 재료와 기법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집대성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들은 우리 전통 색채의 근원인 재료학과 불가분의 귀결이자 성취이다. 그는 고려대 재직 중 설립한 ‘색채연구소’에서 다른 전공 교수들과 협업으로 안료 개발에 성공한 바 있다. 이러한 구체적 성과와 업적들을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설연구소 개념의 문화사랑(舍廊)을 설립한 것이다.
 
▲ 인기도서 순위에 오른 작가의 저서
또한 작가는 교수직 퇴임 기념으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미진사)이라는 저서를 냈다. 거슬러 올라가 이미 2001년에 <우리 그림의 색과 칠>이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성황리에 절판되어 후속 증보판을 내기로 마음먹었지만 계속 새롭게 자료들이 축적되고 실험과 개발 사례들이 성과를 내면서 더 체계적이고 방대한 후속 저서의 출간이 미뤄져 이제야 빛을 본 것이다. 본 원고 마감 전 확인이 필요하여 2차 인터뷰를 위해 다시 갤러리를 방문할 때는 책 전문가로서 다수의 도서 모임을 이끌고 있는 최진용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를 모시고 갔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문화적 의기투합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정확한 부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신간 도서 가운데 탑 순위에까지 올라갔다는 기분 좋은 소식이 때마침 출판사로부터 전해졌다 한다. 학술서적이 잘 팔린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 중흥의 기운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의 책이 한국화 전공자들의 교과서를 넘어 국민교양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 정종미갤러리 내부에서 바라본 중정 모습.
 
▲ 한옥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내부.
 
그러고 보면 작가는 드물게 물성적으로 근원을 캐고 들어간 한국화 작가이다. 작가의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우리 그림의 특징은 한 마디로 교화(膠畵)’라는 것이다. 그는 삼국시대 고분벽화나 단청 등에서 견뢰도 높은 색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교라는 전색재(展色材)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써온 먹도 그을음에서 채취된 탄소 알갱이들을 아교로 점착 및 접착시켜 준 재료의 하나이다. 이는 서양의 유화가 테레핀 같은 기름을 용매로 쓰고 있는 것과 대조가 되는 것이다. 안료는 방식상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별반 없지만 용매 혹은 전색재가 기름이냐 아교냐에 따라 문화의 결과물이 상이해진 역사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물론 수성안료에서 아라비아 고무 등의 재료가 더 있지만, 사용 빈도가 높은 것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튜브에 담긴 기성품 안료를 쓰더라도 그것들의 물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작품 발색의 차이로 이어지고 작품의 수명이 달라지는 등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중대한 기초라고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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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군마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회화사에서 많이 회자되는 모리스 드니의 말처럼 안료의 물성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슷하지만 다른 동·서양의 안료를 어디에 그리느냐 하는 것, 즉 용지의 선택도 중요하다. 서양화는 광목천으로 된 캔버스 위에 안료가 점착되는 것이지만, 한국화의 경우 안료가 종이에 스며들어 종이 자체의 조직들을 염색시키는 방식과 유사하다. 따라서 종이의 성분과 텍스처·층 등이 어떠하냐에 따라 발색이 달라진다. 화선지·장지 등의 다양한 종이 종류를 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목 위에 안료가 층층이 발라지고 쌓이는 유화의 방식과, 종이에 스며들어 종이와 안료가 일체를 이루는 방식. 이는 마치 ‘서양의 물질문명·동양의 정신문명’이라는 대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몽유도원도, 66 x 48cm, 한지에 안료 염료, 2000.
 
▲ 산수_여성, 가변설치, 2015.
 
특히 알카리성인 한지가 오랜 세월 보존 가능한 물성을 지니는 것은 먹 못지않게 신비를 간직한 재료과학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회화를 무시했던 것이 종이 위에 그린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 종이는 동양으로부터 늦게 도입되기도 했지만, 산성지여서 한 세기 보존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중세말에야 터득한 두꺼운 광목천에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야말로 작품이 오래 가고 표현 또한 깊이 있게 이루어진다는 편견에 사로잡혔다. 동양의 종이가 오랜 세월을 견디는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동양의 그림을 가벼운 드로잉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삼베부인 68 x 77cm, 한지 삼베, 2004.
 
▲ 어부사시사 보길도, 968 x 181cm, 모시 안료 염료. 2000.
 
한국화의 생명인 지·필·묵(채). 일반인들은 이 중에서 지(紙), 즉 종이의 소중함을 많이 간과하지만 작가들은 예민하게 대한다. 정종미 작가는 미국 체류 시절부터 종이에 대한 연구도 깊이있게 병행했다. 그렇게 종이 연구에서 터득한 물성을 창작으로 이어간 것이다. 종이에 스며들어 가는 안료들이 색깔에 따라, 그리고 광물별 추출 성분에 따라 달라지며 자기들끼리의 미묘한 섞임과 어울림 그리고 종이와의 미세한 상호작용들을 통해 빚어 내는 물성의 세계는 보는 이들에게 다른 형상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느낌을 심어 준다. 그 모습들을 관조하는 데서 오는 희열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화단에서는 드물게 물성의 사역을 극대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절제와 관조의 경험을 중시하는 추상성은 물성의 언어, 즉 재료 자체가 말하는 바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미학적 배려이다. 
 
▲ 정종미 작가.
물론 ‘종이부인’ 연작은 좀 예외다. 이 작품은 전통적 미인도의 네거티브 배경에서 포지티브 조형요소로 변환되고 있는 연작 그림으로  입체와 오브제로 재현 내지는 재해석하는 유형이다. 종이가 오랜 역사 속에서 중요한 문화적 성취와 함께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정작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 현실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는 하나의 그라운드 혹은 무대로서의 역할만 해 온 데서 해방시켜 조형적 표현의 주역으로 클로즈업시키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조형의 한마당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상과 효과의 최대치를 도출해 내는 조형요소로서의 기능에 방점을 찍고 있음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들은 한국화·양화를 떠나서 기초과학 교과서 같은 가치까지 지닌다. 또한 그것이 우리 문화 정체성 찾기의 요체이자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성지 같은 문화공간에 있으니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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