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좌익운동은 1972년 10월 출범한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사회주의 건설 목표를 숨긴 채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기치를 내걸면서 세력 확산을 꾀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좌익 세력은 정치 문제와 학내 문제 외에 노동현장·농촌·빈민운동 등에까지 진출해 현장 투쟁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 계기는 1970년 11월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다. 이후 좌익 세력은 이른바 민주화운동(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민중운동, 즉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소외계층에 대한 견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75년 무렵에는 좌익운동권 사이에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 서울대 내 지하 좌경 이념써클인 한문연(한국문학연구회)은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에서는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장 활동의 활성화를 강조했는데 전자를 ‘정치투쟁론’, 후자를 ‘현장론’이라 칭한다.
좌익 세력은 공개적으로는 일반 학생·지식인 및 국민 대중의 순수한 민주화 열망을 수단삼아 정권 타도를 실현하기 위해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혁명의 주력인 노동자와 학생에 대한 좌익 의식화 공작에 주력하고 북한과의 연계 속에 전국 규모의 전위조직 결성을 시도했다.
당시 북한은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 때 이전의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을 보완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을 대남 전략노선으로 설정하고 위장 평화공세를 전개했다. 북한은 평화통일 8개 방안 발표(1971.4), 남북적십자회담(1971.9), 7.4 공동성명(1972) 등을 발표하며 대화 공세를 통해 우리 국민의 대북 경각심을 이완시키며 북한의 폭력성을 평화로 위장해 대남 선전선동을 강화했다.
그러나 7.4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남침용 땅굴’ 굴착에서 드러나듯이 이중성을 보여 주었다. 1973년 들어서 북한은 남북대화를 통한 적화혁명의 결정적 시기 조성이라는 전략에 한계를 느끼고 같은 해 8월28일 일방적으로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며 대남 혁명의 새로운 여건 조성을 위해 남한 정세에 편승한 반합법·비합법 영역에서의 통일전선 구축 공작에 주력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사건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1979)이다. 남민전은 1960년대 인혁당·통혁당 사건의 관련자들이 출감 후 재규합하여 북한과의 연계 속에 1976년 2월29일 결성한 지하 혁명조직이다. 이들은 노동자·농민·청년학생·도시빈민 및 각계각층의 민중을 규합하여 각종 투쟁을 전개했다. 남민전은 ‘민주투쟁국민위원회’라는 전위조직 산하에 민주구국노동연맹·민주구국농민연맹·민주구국학생연맹 등을 설치하고 ‘민주화투쟁’으로 위장한 적화 혁명을 꾀했다. 남민전은 1978년 3월 대외 연락책인 안용웅을 일본을 통해 북한에 입북시켜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혁명투쟁보고서를 전달하며 혁명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자체 자금조달과 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혜성대’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금품 강도 및 상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칼빈 소총·사제 수류탄 등을 제조하며 도시게릴라 방식에 의한 무장봉기로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꾀하다 1979년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좌익 사건으로 이재문·신향식·안재구 등 핵심지도부와 관련자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 해방 후 최대의 좌익 사건이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자칭 민주화운동의 행동 세력이었던 학생운동 세력은 지하의식화그룹에 참여한 핵심 세력만 좌익 의식화된 상태였고 유신반대 시위에 참가한 대부분의 일반 학생들은 유신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순수한 민주화 열망으로 동참한 것이지 좌익 혁명론에 동조한 상태는 아니었다. 좌익 세력은 여전히 일반 학생들에게 그들의 사회주의 지향성을 숨긴 채 ‘민주화운동’으로 위장해 활동을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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