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다는데, 자식과 골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자식을 둘 키워 보았고, 골프에 입문 정도는 해 본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배경과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라 표현하곤 한다. 금수저로 태어난다면 물론 다른 경쟁자들보다 조금 앞에서 출발하는 유리한 점이야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톤보다 더 오래 달려야 하는 인생이란 레이스에서 볼 때는 태어난 환경이 그리 결정적이라 할 수는 없다. 좋은 배경의 후광은 더러 달리는 주자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갖가지 유형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화가 허진(60)은 우리 미술계 금수저 가운데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런 표현이 불쾌감을 주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다.) 소치 허련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명문 가계도는 지상에 너무 많이 소개된 바 있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긴 화업의 레이스에서 얼마나 잘 달리고 있느냐이다. 미술계 금수저 가운데 그만큼 열심히 화업에 매진한 작가도 드물다. 80년대 말 작가와 면을 나눈 때부터 탄탄한 기량을 잘 쌓고 재능까지도 번득이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묵과 채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토대 위에, 시대와 미래의 방향을 읽는 통찰력과 감수성 등에서 촉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황창배와 함께 ‘현대 한국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기대주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말, 작가의 본격적인 화업이 시작된 때는 우리 미술계가 격변기에 놓여 있던 시점이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에 직면하여 모두가 부심하던 때, 우리는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까지 겪고 있어 화단에 면식을 드러내는 신인작가들로선 곤혹스러울 수도 있었다. 당시 작가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1988년에서 1991년으로 이어지는 ‘묵시’ ‘유전’ 시리즈는 우리 화단에 충격파를 던졌으며, 필자에게도 어떤 영감을 주고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현실이냐 자율성이냐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 같은 담론들이 영감을 주었던 것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집단적 개성과 같은 화두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더 중대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은 9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생태와 환경이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일찍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횡단성·리좀·생태철학 등에 심취한 바 있었던 작가는 보다 명료한 생태철학과 서사를 역설하고 있다. 2000년대부터 ‘익명 인간’과 ‘유목 동물’ 등의 명제 연작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사람의 형상이다. 평면적인 사람 이미지가 스케일 면에서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축소되고 있다. 이미지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도 그렇지만 서술 방식조차도 실루엣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을 거의 공통적으로 띠게 된다.
작가에게 익명 인간과 유목 동물은 서로 호환되는 개념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구상의 다양한 동식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어쩌면 인간도 그 무리 가운데 하나의 류(類)나 종(種)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보편적·생태학적 사고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본주의 이전의 생명주의의 입장으로도 보인다. 여기서 유목 동물이라 함은 사바나 초원 같은 곳에서 먹이를 찾아 언제든지 거처를 옮기는 동물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진리관·존재관을 공유한 떠돌이 인류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도의 언어 체계를 지니고 있지만 동물들 틈바구니에서 일종의 바이러스와도 같은 기생 양식을 지닌 채 중력도 없이 부유하는 존재로 인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동물의 표피에 낙인처럼 찍혀 있는 이미지들 역시 자연 생태에 대한 비판적 테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 문명에서 전가의 보도와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끝도 없이 등장했다가 무중력 상태로 떠돌고 있다. 문명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적대성은 없어 보인다. 이 도구들이 있기에 현생 인류는 유동하고 부유하는 유목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이마저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런가 하면 화면 여기저기엔 남쪽 해안에 산재해 있는 조그만 무인도 같은 이미지들도 함께 뒤섞여 있다. 그 섬들 역시 바라 위를 떠도는 유목의 상징적 라임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근래 들어 작가의 화면은 무수히 많은 반점들로 채워지고 있다. 더 많은 존재 생략의 암시이자 유동과 부유의 유목적 현상에 대한 점층적 수사로도 읽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람·동물·도구·섬 모두가 점으로 환원될 존재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수묵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다졌고, 또한 시대에 대한 통찰과 다양한 방법들을 섭렵한 작가에게는 표현을 위한 서사가 참으로 섬세하고도 다양한 것 같다. 방법적으로 선염(渲染)이나 배수·갈필·프로타지 외에도 독창적인 기법들이 다양하게 동원되고, 화면은 분할과 응집을 통해 옴니버스의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한국화의 역동성과 유연성을 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수묵의 유현함을 통해 심미적 은유성을 담보하고, 또한 채색의 강렬성을 통해 현대적 감성에 어필하고 있으니 한국화가 가지는 가치와 경쟁력 또한 밝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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