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방법 중에는 ‘살아 보기 명상’이 있다. 눈을 감고 앉아서 다가올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미리 살펴보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행위로 말하면 ‘생각 스케치’라고도 할 수 있고 건축으로 말하면 ‘초벌 조감도’다.
‘명상’이라고 하면 막연해 하는 사람이 많다. 다리 꼬고 앉아서 눈 감는 것은 나한테 너무 어려워! 당신이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좋다. 자세는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이런 저런 매체에 나오는 명상 자세는 말 그대로 촬영용에 가깝다. 다만, 몸을 자연스럽게 멈춘 상태에서 ‘고요히 생각해 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생각해 볼 때 ‘오늘 하루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 스스로에게 다감하게 물어보는 정도면 만점이다. 자신한테 그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소위, ‘살아 보기 명상’을 하게 되는 셈이다.
당신은 늘 생각하면서 산다. 부지불식간에 ‘이걸 어떻게 하지? 그이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말이다. 주로 이런 저런 가설을 세우면서 거기에 대비하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수비적 사유다. 나한테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듣기 싫은 말을 듣게 되는 일, 내가 싫어하는 행위를 보게 되는 일…. 이런 생각이 주요 품목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도,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와 산만한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차이가 있다. 고요한 마음으로 ‘다가올 일’을 떠올리면 그 일에 대한 그림도 차분하고 명료하다. ‘어떻게 대비하지?’가 아니라 ‘어떻게 어우러질까?’ 정도로 순화된다. 당신은 부지불식 간에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툼을 예상하면 다투게 되고 대화를 결심하면 대화로 풀린다.
지나온 삶에서 내가 그린 ‘생각 스케치’를 찬찬히 되돌려 보라. 그러면 인간관계를 비롯한 세상일이 결국 ‘내 마음대로’였다는 흔적을 보게 된다. 이유가 있다. ‘생각 스케치’는 게으른 사람의 몽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지런한 사람의 특징은 아침에 하루를 ‘어떻게 살까’ 생각해 보는 일부터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불세출의 화가이자 발명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일상과 예술이 ‘생각 스케치’였다. 스티브 잡스 또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빠르고 거친 스케치로 시각화하는 데 골몰했다. 영화 ‘아바타’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론·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이들의 공통점은 ‘생각 스케치’ 대가라는 점이다.
명상과 ‘생각 스케치’는 다르지 않다. 완전한 공통점이 있다면 ‘마음의 고요함’이다. 스케치에 집중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려 보라. 어떤가.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눈알을 굴리면서 스케치 펜을 놀리고 있을까. 아니다. 지극한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상상이나 이상의 추구를 ‘명상’이라고 할 수 없듯이 ‘생각 스케치’ 또한 마찬가지다. ‘생각 스케치’는 이루어질 확률이 높은 가상의 세계다. 가상 세계를 가장 먼저 그려 내는 수단이 무엇이던가. 만화다. 만화에서 나온 그림이 전기 트럭으로 현실화되지 않던가. 당신이 자신의 내일을 ‘생각 스케치’한다는 것은 건축 전문가가 집터 앞에 서서 ‘거칠게 끄적이는’ 일과 같다. 세상의 복잡 오묘한 인공물은 모두 그렇게 출발한다. 인도의 타지마할·에펠탑·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파리의 루브르 박물관도 한 장의 ‘생각 스케치’에서 시작되었다.
‘생각 스케치’를 즐기는 것은 본성의 결을 즐기는 일이다. 인류는 그렇게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화하면서 발전해 왔다. 미래를 현재화하는 유전자는 물론 당신에게도 내재해 있다. 그것이 ‘명상’이라는 이름이 됐든 ‘생각 스케치’라는 이름이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그와 같은 행위로 당신과 주변의 삶이 어떻게 밝고 아름답게 펼쳐지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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