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기원전 18년에 부여(扶餘)족 계통인 온조(溫祚)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346년에 즉위한 근초고왕(346∼375)은 먼저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의 체제를 완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하는 영토확장 정책 추진에는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국내의 정치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고 추진했다.
근초고왕의 업적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영토확장이다. 그는 대륙백제의 땅을 크게 확장하여 남쪽으로는 양자강, 북쪽으로는 요동 지역, 그리고 서쪽으로는 덕주·곡부·청강·양주에 이르렀으니 그 영토는 본토인 한반도 백제의 몇 배나 되었다. 고구려와의 충돌은 이러한 영토확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패권 다툼의 결과였다.
당시 대륙백제의 거점은 산동성 지역이었는데, 서진(西秦)이 몰락한 이후 중원의 변방에 해당하는 산동성과 강소성엔 백제를 능가하는 거대 세력이 없었다. 백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선 남진정책을 감행하여 산동성과 강소성을 장악하였다.
근초고왕은 즉위 초에는 주로 대륙백제의 거점인 산동성 지역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다가 점차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북진을 시작한 시기는 모용 선비가 세운 연(燕)이 몰락하고 있던 360년대였다. 당시 모용 선비는 세력이 약화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모용 선비의 몰락은 북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제에겐 호기가 아닐 수 없었고, 역시 남진의 기회를 찾고 있던 고구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륙백제의 땅은 한반도 본토보다 몇 배나 컸기 때문에 대륙백제에도 한성 못지않은 거대한 왕성이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근초고왕은 즉위 초 십수 년간을 대륙에서 보냈는데, 대륙백제의 도성은 책계왕 원년에 보수한 대방 땅의 위례성(하남 위례성)일 것이다. 근초고왕은 줄곧 위례성에 머물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뒤에야 한성으로 돌아왔다.
백제가 장악한 지역은 광양·조선·낙랑·대방·광릉·청하·성양 등이다. 대방은 지금의 산동지역, 낙랑은 그 북쪽, 조선은 낙랑 북쪽의 요서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의 패권 다툼 과정에서 등장하는 치양·패하·수곡성 등은 모두 대륙백제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도성 평양이 지금 북한의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보고 있으나, 당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지금의 요동 동쪽 요녕성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1000여 리 지점에 있었는데,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령했다. 백제가 다스렸던 곳이 진평현과 진평군이라고 송서(宋書)에 나와 있고, 진나라 때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진평 2군을 점거했다고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 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기원전 18∼475년)·웅진도읍기(475∼538년)·사비도읍기(538∼660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가 도성을 두 번이나 옮긴 것은 국력 신장을 위한 계획적 조치가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밀려 단행한 것이다. 그것은 승전보다 패전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백제는 존립 기간 중 고구려와 36회, 신라와 70여 회의 전쟁을 치렀다. 특히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와의 집중적인 충돌로 국력이 소모되어 국가 발전이 둔화되었고, 6세기 이후에는 신라와의 빈번한 충돌로 남방의 경제력으로도 국가재정을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전쟁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대사이므로 불리한 전쟁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확고한 동맹이 필요하다. 어느 한 나라가 상대국을 군사력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 삼국시대에는 확고한 동맹이 더욱 요구되었다.
대륙백제의 웅혼한 기상은 13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 백제는 중국 왕조와의 직접적인 교섭과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자기화했고, 이를 다시 신라·가야·왜에 전수해 주었다. 백제의 이러한 개방성과 국제성이 바로 충청 지역민들의 개방성의 근원이 되었다. 충청인들의 절의(節義) 정신과 저항 정신의 뿌리도 백제 시기까지 올라간다고 할 수 있으며 충효 정신이 백제 정신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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