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미드필더인 크리스티안 에릭센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릭센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구사일생의 삶으로 여전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2024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24)에 덴마크 대표로 출전한 에릭센이 보름 전 슬로베니아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자 “인간 승리의 완성이다” “기적적인 골로 감동을 선사했다”며 외신들이 대서특필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는다. 갑자기 쓰러졌던 무대인 유로 대회에서 3년 만에 복귀 골을 터뜨린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덴마크 대표로 A매치에 134경기에 출전하고 42골을 넣은 에릭센에게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한 골이었다. 그는 이번에 덴마크 역대 A매치 최다 출전자가 됐다. 3년 전인 2021년 6월 유로2020에 출전했던 그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린 핀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 선발 출전해 경기 도중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져 큰 충격을 안겼다. 상대와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심장이 멈춘 것이었다.
심정지 증상으로 꼼짝달싹도 못하게 된 그는 동료들의 심폐 소생술과 응급조치를 받고 들것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뒤 심장 제세동기 삽입 수술을 받았다. 대형 병원이 인근에 위치해 있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사망률이 90%에 달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경기는 재개되었고 핀란드의 1-0 승리로 끝났다. 골을 넣은 선수는 에릭센의 사고를 지켜본 만큼 기쁨을 드러내는 골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핀란드 관중이 “크리스”하고 외치면 덴마크 관중은 “에릭센”으로 화답하면서 그의 쾌유를 기원하는 아름다운 감동의 모습도 연출됐다.
에릭센처럼 갑작스럽게 심정지로 쓰러지는 경우 평소 심장에 고질적 문제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다. 우리나라 K리그의 신영록이나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숨진 카메룬의 마르크비비앙 푀, 스페인의 안토니오 푸에르타 등 축구판에 이런 사례는 제법 많다. 야구선수인 롯데 자이언츠의 임수혁과 미국프로농구(NBA) 시카고 불스의 라마커스 알드리지도 같은 케이스이다. 이들은 모두 숨지거나 곧바로 은퇴했다. 유럽 축구 정상급 미드필더 에릭센의 축구 인생도 이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에릭센의 불굴의 집념과 정신력은 그를 다시 그라운드에 서게 만들었다. 과거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손흥민과 잉글랜드의 골잡이 해리 케인 등 동료들과 팬들의 응원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 동료들의 응원이 빗발쳤다.
평소 동료들에게 많은 걸 베풀고 늘 양보하며 살았던 에릭센이었다. 손흥민은 한국과 레바논의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 예선전에서 골을 넣은 뒤 에릭센의 등번호 ‘23’을 손가락으로 펴 보이고 중계 카메라에 다가가 “Hey Chris, stay strong. I love you(크리스, 힘내! 사랑해)”라고 외치기도 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 때문에 에릭센이 퇴원한 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유로2020 덴마크와 웨일스의 16강전 경기장이었다. 쓰러진 지 불과 열흘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에릭센의 인간 승리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기 시작 전 양 국가의 대형 국기를 펼치는 대신 에릭센의 유니폼을 펼치도록 하는 이례적인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다시는 그라운드에 서지 못할 것”이라던 의사들의 판단을 비웃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천하고 싶었던 에릭센이었다. 그는 가벼운 런닝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개인 훈련을 하며 복귀를 꿈꿨고, 결국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릭센의 축구 인생은 심장마비로 잠시 쓰러졌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시 그라운드에 선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데 그는 그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제세동기 삽입 수술을 받은 에릭센은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소속팀 인터밀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이류팀 브렌트포드로 이적한 그를 명문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영입했다. 토트넘을 떠난 지 2년 만에 영국 땅을 다시 밟은 셈이다. 맨유에서도 벌써 80경기 이상을 소화했다. 오른발 왼발 다 쓰며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패스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격렬한 몸싸움을 하며 경기당 12km 정도를 뛰어야 하는 그가 프로 축구선수로 그라운드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는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올해 33살인 그가 언제까지 그라운드를 누빌지는 모른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선수 생활을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병헌 디지털뉴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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