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남북정상회담에 기대를 걸었던 김일성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선제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나서서 김일성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하여 클린턴이 작전 개시 2시간 전에 계획을 취소했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1990년대의 북한 경제는 심각할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다. 달리 뾰족한 대책이 없었던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서에 호소하면서 경제 원조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1994년 7월25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은 그래서 묘향산 특각에 들어가 중진들과 함께 회담 전략을 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일성의 대남 전략에 반대하는 별도의 모임을 갖고 부자간에 정치적 불협화음을 조성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하면 아버지 김일성의 위상이 높아져 권력 전면에 복귀할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입지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김일성이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를 만난 자리에서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전면에 나서서 향후 10년간은 더 나라를 위해 일할 계획이라고 발언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평양 대동강 초대소에 심복들을 모아 놓고 남북관계 정상화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그의 측근은 대남공작 총책 김용순·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영철·경제통인 연형묵·군수산업 총책 전병호, 그리고 한승룡·최태복·김기남·김국태·박남기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김일성의 빨치산 세대가 아니고 그 자식들로서 김정일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다짐한 인간들이었다.
그 당시 김일성은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일을 했을 뿐 당·정·군의 모든 업무를 김정일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김일성의 사무실과 사저에 대한 전화 도청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김일성은 김정일을 경계해서 정상회담 장소를 평양이 아닌 묘향산으로 정한 것이라 짐작된다. 김일성은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김정일을 제외한 중진들을 모아 놓고 회담 준비를 위한 전략을 짜기 위해 토의에 토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묘향산 특각 회의
김일성의 비서실장이었던 전하철의 비망록에 의하면 김일성의 정책 기조는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농업 정책을 최우선으로 해서 비료 생산·전력 문제·섬유공업과 철강 생산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는 당 중진들과 그런 문제를 토의할 때는 의도적으로 김정일을 참석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1994년 7월7일 오전, 묘향산 특각 회의에서 김일성이 철도상에게 물었다.
“이번 정상회담을 위해 남쪽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오는데 비행기로 오지 않고 철로를 이용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북남 철길을 연결하는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그러나 철도상은 묵묵부답이었다. 김일성이 다그치자 그는 “위대한 수령 동지, 그 공사는 할 수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격노한 김일성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이 공화국 내에서 김일성의 교시가 실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하고 소리치자 철도상이 이렇게 해명했다.
“지금 식량 배급이 중단되어 노동자들이 먹지 못해서 비실비실하는데 저들을 노동 현장에 동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답변을 듣고 김일성은 더 충격을 받았다.
“언제부터 이랬다는 건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듣게 되는가?”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회의에 참석한 간부들이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국가의 중요 문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뒷방 늙은이로 가두어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일성의 중대한 결심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그날 오후에 사전 예고 없이 특각에서 가까운 함경남도 함주군 내 5개 협동농장을 기습 방문했다. 농민들을 만난 김일성은 그들로부터 식량 배급이 중단된 지 오래고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아사 일보 직전이라는 하소연을 들었다.
특각에 돌아온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를 긴급 소집했다. 연락을 받고 묘향산에 도착한 간부는 강성산 총리·부주석 이종옥·김영주·외무상 김영남 등이었는데 김정일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 밤 9시경에 김일성은 전화로 함경남도 도당 책임비서를 불러 도내의 식량 사정을 물었다. 돌아온 답은 함경남도에서도 식량배급이 중단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김일성은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 김일성은 다음 날 날이 밝으면 중대한 조치를 선포할 각오를 하고 9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비서 전하철이 비망록에 적어 두었다. 전하철의 비망록에 의하면 김일성은 1994년 7월7일 밤 10시30분경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둔 욕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시간 이후에 김일성의 동정을 목격했거나 살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94년 7월8일 새벽 2시에 전하철이 욕실에 들어가 김일성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가 사망한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다. 7일 밤 10시30분과 8일 새벽 2시 사이에 사망한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망 방조
이 소식을 들은 평양에서는 김정일이 당 간부들과 의료진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로 묘향산을 향해 떠났다. 그때 경호담당 호위 군관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김정일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묘향산에 도착한 김정일은 아버지가 소집한 상무위원회 회의를 집행하면서 김일성이 의도했던 경제문제 대책을 전혀 거론하지 않고 참석한 간부들에게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한 후에 김일성의 시신을 싣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평양에 도착한 김정일은 곧바로 호위사령부 제2총국(김정일 담당)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제1총국(김일성 담당)의 추가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니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전 제1총국 군관 출신 탈북인 유경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묘향산 특각에서 제1총국 경호원들과 제2총국 경호원들 사이에 총격전이 있었고 몇 사람의 사망자도 발생했으며, 그 후 김정일은 제1총국을 해체하고 군 보위사령부 안에 ‘10호실’을 신설하고 제1총국 출신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끝으로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추가하자. 김일성이 평양을 떠나 지방이나 특각에 가게 되면 의사 8명과 간호사 8명이 동행한다. 그런데 그해 연초에 김정일은 지난 35년간 김일성의 심장 질환을 담당했던 노련한 의사 홍건의 박사를 해고하고 루마니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풋내기 의사를 대신 배치했다. 이번 묘향산에도 이 무경험자 풋내기 의사가 따라갔다.
그는 김일성이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간 사실도 모르고 낮에 김일성이 가슴에 통증이 있다고 말한 사실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아무런 예방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밤 10시30분부터 새벽 2시까지 아무도 김일성의 사망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 없었고 방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그때 의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정일은 그들의 책임을 추궁했어야 마땅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한 일이 없었다. 결론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망을 미필적 고의로 방조했다는 것이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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