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일본에서 온 무용수
김정일은 1971년부터 이미 만수대예술단의 북송 교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와 은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1971년 당시 김정일은 성혜림과 아직 동거 중인 상태였다. 1973년에 김영숙과 정식 결혼을 하면서 이듬해인 1974년에 성혜림이 모스크바로 떠났으니 고용희를 만나고 몇 년간은 내연의 처와 정식 결혼한 본처를 따로 두고 또 새로운 여자를 만나 관계를 이어 간 것이다.
고용희는 1953년 6월16일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고경택(高京澤)은 제주도 출신으로 1929년에 일본으로 이주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사카의 군복공장에서 일하는 등 부역자 노릇을 한 친일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용희는 고경택의 2녀 중 맏딸이었는데 그녀가 10살 되던 1962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송 교포로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고용희는 빼어난 미모와 무용 실력으로 20대에 만수대 예술단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정일의 비밀파티 기쁨조의 대원이 되었고 1976년부터는 기쁨조에서 김정일의 고정 파트너가 된다.
두 사람은 결국 동거를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김정철(1981년 9월25일생)·김정은(1983년 1월8일생)·김여정(1987년 9월26일생)이 태어난다. 고용희는 김정일과 동거한 여자들 중에서 김정일에게서 가장 많이 사랑받았고 또 김정일의 후광을 업고 권력 내부에 가장 많이 관여한 여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991년경부터 김정일의 후계자로 자기 소생을 옹립할 것을 구상하고 권력 실세들을 선물 공세로 포섭하며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설쳐댔다. 그녀의 공략에 놀아난 인물은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김용순·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제강·인민무력부 총참모장 김영춘 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었다. 그건 벌써 20세가 된 김정일의 엄연한 장남 김정남의 존재였다. 권력 실세들 가운데 벌써 그를 감싸고 도는 막강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남을 지지하는 세력은 군부에서는 이을설을 중심으로 하는 고위직 지휘관들, 당에서는 고모부 장성택이 요지부동한 후견인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후계 문제를 둘러싼 암투
고용희를 따르는 무리와 김정남을 지지하는 무리의 두 세력 사이에서 김정일의 후계자 문제로 치사한 암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 김정일은 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 문제로 왈가왈부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후로 싸움이 잠잠해지는 듯했고 2004년 8월13일에 고용희가 사망한 후로는 그들의 암투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2004년 12월, 김정남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체류하고 있을 때 죽은 고용희의 잔당 세력의 소행으로 믿어지는 김정남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압력으로 이 사건은 없었던 일처럼 처리되었다.
김정남은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 후로는 자유롭게 해외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2001년에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갔다가 적발된 사건 이후 후계자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나 여생을 해외에서 떠도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마음 놓고 신변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오스트리아·스위스·중국·마카오·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고모부 장성택이 은밀히 그의 생활비를 조달해 주었다.
장성택과 이제강의 기 싸움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벌어진 암투는 주로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며 국방위원회 위원인 장성택과 당 조직지도부 제1부 부장인 이제강 간의 기 싸움으로 집약된다.
개혁파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보안 기관·검찰·국방위원회·인민무력부를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김정남의 고모부라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었고, 경제의 개혁·개방을 꿈꾸는 모사가였다. 반면에 수구파 이제강은 당 조직과 간부들을 좌지우지하는 김정일 다음의 최고 권력 실세였다.
그리고 이 두 권력 실세의 기 싸움 뒤에는 후계자 문제가 작용하고 있었다. 장성택은 개혁 성향이 있는 김정남 편이고, 이제강은 수구 성향의 김정은 편이었다.
장성택이 2002년에 개혁·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선포하자 대다수 당 간부들이 그에 호응했다. 그러자 이제강이 그를 견제하기 위해 나섰다. 당의 총체적 조직과 활동을 장악하고 있던 이제강이 장성택의 호화 방탕한 사생활을 고발한 것이다. 결국 장성택은 2004년에 숙청되어 혁명화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기업소에서 3년간 고생을 했다.
장성택은 2007년에 처 김경희의 탄원으로 풀려나 권력에 복귀한 다음 당시 철도성 조직비서였던 이용순의 비리를 적발했다. 그때 이제강이 이용순을 감싸고 돌았지만 2008년 2월에 이용순이 공개 처형되고 그를 옹호한 이제강 계열 40여 명의 간부가 해임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성택과 이제강의 싸움에선 이제강이 승리하게 된다.
그것은 장성택과 이제강의 싸움이 김정남·김정은의 권력 후계 다툼과 연계돼 있고 결국 최종 결심을 해야 하는 김정일이 개혁·개방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 간부 대부분이 절대적으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수령 절대주의와 그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이 북한의 비극이다.
후계자의 길을 걷게 된 김정은
한편 김정은의 형 김정철이 권력 승계에서 밀려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말하기를 자신의 장남인 김정남, 그리고 고용희 소생의 장남인 김정철은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전정신이 없는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이고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김정남은 사실 초기에는 권력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또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용희를 공략하는 데서 패배했다. 고용희 편에서는 김정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2005년에 김정철의 건강 문제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체내 호르몬 분비가 비정상적이었고 여성스러운 성격이 나타나며 매사에 소극적이고 유약한 기질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생각이 김정은으로 옮겨간 것은 그때부터였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자식들 중에서 야심이 가장 컸다. 하지만 막상 김정일이 2006년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점찍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조부 김일성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김씨 가문의 카리스마 계승을 위해서는 김일성을 많이 닮은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06년 12월24일에 고용희 소생 김정은이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잠정적으로나마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김정일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누워 있을 때 김정은과 여동생 김여정이 매일같이 그를 간병했는데 이때 장남 김정남과 큰딸 김설송은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2009년 1월8일, 김정은의 생일에 김정일은 당내에 공식적으로 김정은을 후계로 결정했음을 공표했다. 이때 이후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며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언동을 하다가 평양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암살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김정은에게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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