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김정은의 전화 보고
김정일을 충격에 빠뜨린 그 전화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딸 설송과 전직 호위사령부 간부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문제는 희천수력발전소 건설 공사의 무리한 공기 단축에 있었다. 이것은 물 8억5000만㎥를 가두는 높이 100m·폭 555m의 댐 공사였다. 김정일은 모든 전력을 댐 공사에 최우선으로 공급하라고 했으나 배전시설 자재 부족으로 그것이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양생이 되지 않은 콘크리트 위에 시멘트를 퍼부었고, 시멘트가 모자라면 흙을 섞었다. 그뿐 아니라 공사의 총감독을 맡고 있던 김정은이 고강도 시멘트 1000t을 다른 공사에 전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공사는 되돌릴 수 없는 부실 공사가 되고 말았다.
김정은이 전화로 보고한 내용은 댐 공사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도처에서 누수 현상이 발견되어 안전상에 큰 문제가 있었고 3년 내에 완공은 불가능하다고 하며 완공이 되어도 원래 계획 발전량의 20%를 초과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강성대국의 꿈이 산산조각나며 그는 견딜 수 없는 허탈감에 빠졌다.
딸 설송을 찾은 이유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조부 김일성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3대 세습을 위해서는 김일성에 대한 인민들의 향수와 그것을 이용하기 위한 이미지의 연속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딸 설송이야말로 김정일이 평소에 가장 많이 믿고 아낀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설송은 본부인 김영숙의 소생이고, 김정은은 혼외 여인 고용희의 자식이었다. 김일성도 생존 시에 손자녀 중에서 설송을 가장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니 위기 상황에서 김정일이 아끼는 딸 설송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때 딸 설송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은 미숙하고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다음에 김정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김정은에 대한 실망으로 어떤 후속 조치를 취하기 전에 그가 사망한 것이다.
김씨 부자의 화려한 죽음
‘금수산태양궁전’은 평양 근교 금수산 자락에 세워진 초호화 건물이다. 1973년 3월에 착공해 1977년 4월15일 김일성의 65세 생일 선물로 헌납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되었고 ‘금수산의사당’ 또는 ‘주석궁’으로 불렸다. 이 건물은 대지 350만㎡에 연면적 9만㎡의 3층 대리석 건물로, 인도의 타지마할에 버금가는 호화로운 건물이다. 건물 앞 광장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415m×216m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김일성 사망 후 1994-95년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영구 보존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전문기술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건물 3층에 시체를 안치할 지성소를 구축하고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데 8억9000만 달러를 사용했다.
건물 외벽에는 학과 구름이 양각된 70만 개의 세계 최고급 어영석 블록(잘게 부순 천연석을 색 모르타르로 굳혀 두꺼운 판상 형태로 만든 일종의 인조 블록)을 붙였고 지성소 출입문 손잡이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이때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3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는데 그 돈으로 식량을 수입했다면 전 주민이 3년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 공사 중에 김정일의 평양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 갱도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수백 명의 노동자가 과로와 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보도되지도 않았고 그 사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간부도 없었다. 아무튼 이 작업 이후에 그 건물은 ‘금수산기념궁’으로 불렸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사망하자 그도 동일한 방법으로 방부 처리되어 시신은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누워 있는 지성소 옆자리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건물은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되었다. 이때에도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유리관 속에 안치하는 데에 약 100만 달러를 사용했다.
그 이후에도 러시아에서 불러온 전문가들이 수시로 점검 관리하며 두 독재자의 시신을 보존했다. 건물 시설관리와 보안 경비, 행정 비용과 관계 인원의 급료와 기타 비용을 합해 해마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쓰면서 북한은 다른 나라에 경제 원조를 애걸하고 있다.
장성택과 후진타오의 비밀회담
김정일 생존 시부터 누적되어 온 경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장성택은 중국을 설득해 새로운 방식으로 북한 경제의 활성화를 추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12년 8월에 50명이 넘는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경제특구 공동개발 추진과 10억 달러의 긴급 차관 요청을 위해서였다. 중국 측에서는 장성택을 북한의 권력 실세로 보고 과거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동등한 수준으로 그를 예우했다.
통역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한 시간 이상의 밀담에서 장성택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에게 10억 달러의 긴급 차관을 요청했다. 그러자 원자바오는 “북한이 지금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어 국제사회가 주시하고 있는데 중국이 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정당성을 합리화해야 하는 법적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즉답을 피했다. 그때 장성택은 “필요하다면 우리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성택 개인의 의사이지 북한 체제와 당의 전략은 아니었다.
그날 회의가 끝날 무렵 후진타오가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는 새 지도자 김정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 장성택에게 물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준비되어 있는가?”
그러자 장성택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김정남입니다.”
저우융캉, 북한과 내통한 첩자
이와 같은 극비의 회담 내용이 어떻게 해서인지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회원 저우융캉(周永康)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중국의 지도부 모르게 그동안 북한과 내통해 온 첩자였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극비의 회담 내용을 북한의 모 비밀기관에 누설했다. 그리고 그 일이 발각되어 국가기밀 누설죄로 무기징역 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북한에서도 김정은과 주요 실세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으로 취급되었다. 김정은은 장성택이 귀국하자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고 그가 처형될 때까지 정책 상담을 하지 않았다. 고모부 장성택이 그의 최고 보호자의 위치에서 최고로 위험한 적으로 바뀐 것이다.
장성택이 시도하려 했던 북한의 경제개혁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좌절된 것이다. 중국의 권력자 등 주변에선 그를 경제개혁뿐만 아니라 북한의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능력자로 보았다. 그래서 많은 분석가들이 그가 북한의 고르바초프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김일성 일가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너무 믿고 방심한 것이다. 한마디로 적에 대한 방어가 너무 허술했다. 그는 수령 절대주의 세력을 향해 먼저 칼을 뽑았어야 했다. 그러나 적이 그보다 먼저 칼을 뽑았고 그는 한발 늦은 것이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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