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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도쿄타워] 일본의 세로쓰기는 과학적 진실 무시한 관습의 힘
박정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9-30 06:30:43
▲ 박정석 일본통신원·칼럼니스트
인류의 기록 문화는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로 나뉜다. 동북아시아 문명권은 세로쓰기 권역이었으나 근대 이래 가로쓰기로 바뀌었고 세로쓰기의 대표격인 중국어마저 가로쓰기가 된 지 수십 년이다. 일본어만 예외다. 메이지시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 이래 아시아를 탈피해 적극 서구문명을 배운 나라치곤 기이한 현상이다. 컴퓨터 문서 작업·휴대폰 문자·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NS) 등 현대 일본인의 문자 활동은 이미 가로쓰기가 보편적임에도 신문·잡지나 도서 출판에선 여전히 세로쓰기를 고집한다.
 
인류의 발전은 기록 문화의 진화와 함께해 왔다. 가장 극적인 변화가 2세기 초엽 후한(後漢)시대 채륜의 ‘종이 제조술’과, 15세기 중반 요하네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인쇄술’이다. 종이의 등장으로 기록이 편리해졌다면, 금속활자로 대량 인쇄가 가능해져 보급에 신기원이 열렸다. 책이 필사본으로만 존재하던 시절엔 희소가치가 높고 고가품일 수밖에 없었다. 목판인쇄 시대에 들어서도 책은 여전히 비싼 귀중품에 속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성서를 비롯해 각종 도서 등 활자 매체가 대량 생산·유통되기 시작했다. 소수 특권층에 독점되었던 정보와 지식이 보통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등으로 서구가 근대화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의 하나다. 이보다 빠른 13세기 초 금속활자 인쇄술이 한반도에서 나왔으나 이것이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식자(識字) 대중의 출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인류가 가로쓰기·세로쓰기의 두 종류 기록 방식을 가지게 된 것은 동양과 서양의 자연환경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책(冊)’이라는 상형문자를 보면 왜 동북아 한자 문명권엔 세로쓰기의 방식이 정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이전엔 대나무를 납작하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글을 기록하고 위·아래를 가죽끈으로 묶은 게 책(冊)이었다. 대쪽에 문자를 기록하다 보니 세로쓰기가 편리할 수밖에 없었다. 동북아는 한문이 글쓰기의 전범인 문명권이었기에 한글·일본어·몽골어·만주어의 기록 방식도 자연히 세로쓰기로 정착되었다. 
 
필자는 일본에서 세로쓰기의 상세한 실상을 파악하고자 몇몇 대형 서점과 도서관을 찾은 바 있다. 다양한 책의 종류를 직접 살피거나 그곳의 직원들에게 물어보며 확인한 결과 현재 일본에선 출판되는 도서의 약 95%, 전국에 유통되는 종합 일간지 100%, 심지어 만화책조차 세로쓰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화권도 현대적 인쇄물은 가로쓰기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일본만 고집을 피우는 모습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가로쓰기·가로읽기가 더 효율적이다. TV 화면을 보라. 몇 십 년간 4:3 비율로 출시됐으나 요즘엔 16:9로 나온다. 21:9 비율로 가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인간의 눈이 옆으로 배열돼 있기에 생체 조건이나 라이프 스타일상 수평 형태의 쓰기 및 읽기가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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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가로쓰기 및 띄어쓰기는 개화기 때 한반도에 들어온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광복 후엔 교과서가 가로쓰기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1961년 이후엔 공문서 등의 가로쓰기가 규범화되었다. 단행본이나 신문에서 여전히 세로쓰기를 했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다 가로쓰기로 바뀌었다. 영화 자막은 2000년대 들어 완전히 가로쓰기 전환이 이뤄진다.
 
광복 이후 제일 먼저 가로쓰기를 도입한 신문은 1947년 광주에서 발행된 ‘호남신문’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956년 세로쓰기로 되돌아갔다. 두 번째로 가로쓰기를 한 매체는 1985년 ‘스포츠서울’이었다. 전국지 일간 매체로선 이것이 최초인 셈이다. 이어 1988년 한겨레신문은 처음부터 가로쓰기로 출발했다. 대중 매체 가운데 3번째, 중앙 종합일간지로선 최초의 가로쓰기였다. 가로쓰기가 가장 늦은 중앙 일간지는 세계일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은 1948년부터 공문서와 언론에서 가로쓰기를 전면 도입했다. 중국의 경우 19세기 초 중국어 사전을 편찬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가로쓰기를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7년 후인 1956년 신문과 교과서의 가로쓰기를 개시해 현재에 이르렀다. 대만·홍콩·마카오·몽골에는 세로쓰기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서구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그리스에선 파피루스와 양피지 등이 종이처럼 쓰였다. 식물과 동물의 섬유질 결 때문에 가로쓰기가 자연스러웠을 것이라고 한다. 아랍어와 히브리어는 가로쓰기이긴 하지만 특이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오른손잡이 기술자가 돌이나 점토에 글자를 새길 때 편리했기 때문이라는 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만 글씨를 쓸 때는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란 인체 구조상 불편한데 이들 언어권에선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모양이다. 전통을 극도로 존중하는 태도 역시 한몫한 것 같다. 아랍권 통합도 쉬운 일이 아니니 가까운 미래에 바뀔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일본의 세로쓰기 또한 특유의 아날로그적 관행 내지 관습적 사고가 과학적 진실을 이기고 있는 듯하다. 언제까지 버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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